누구나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는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서부터 ‘자장면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짬뽕을 먹을 것인가’하는 소소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매일 결단을 내리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한다. 여기서 주지해야할 점은 우리의 거의 모든 결단은 어떻게 하면 나에게 보다 더 이로울 것인가 내지는 어떤 선택을 해야 내가 더 행복할 것인가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기본적인 원칙에서 내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물게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타인이나 공공의 이익, 복리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는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대단한 결단을 내리는 사람을 위인(偉人)이라고 부르며 범인(凡人)과 구별한다. 또한 그들의 결단은 용단(勇斷)이라 불리며 후세까지 길이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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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인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결단을 내리신 강재구 소령
인류사에 있어 용단을 내린 위인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인류사에 비해 일천한 게임사(史)에서도 그러한 위인들은 존재하고 있다. 본 기사에서는 게임사에 길이 남을 용단을 내린 이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업적을 청사에 길이 남기고자 한다.
한 원폭 개발자의 용기 있는 결정이 게임을 탄생케 했으니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미국의 폭격기 한 대가 나타났고 그 이후 커다란 버섯구름과 함께 일본의 전쟁의지는 단숨에 꺾이게 된다. 이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마침내 GG를 선언하게 된다.
갑자기 왜 원자폭탄 투하 이야기가 나오는지 의아해하실 독자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최초로 현대적 의미의 게임을 만든 사람은 월리 비긴보섬 박사이다. 이 분은 저 유명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력을 가진 유능한 과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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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클리어 사일로, 게임의 아버지는 여기에서 근무하셨다고
최초의 게임 개발자라 하여 단순히 월리 비긴보섬 박사를 게임 기술자로 봐서는 곤란하다. 이 머리 좋은 박사님은 원자폭탄의 폭발 제어부를 설계한 사람이었으며 코넬대학 대학원을 다니던 중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 등 천재적인 면으로 당대에도 이미 ‘엄마친구아들’의 지위를 얻었던 분이다. 거기다 전자공학 외에 물리학, 방사선학 등에서 이미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었고 20개 이상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 후 뉴욕 주에 있는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에 근무하게 된 월리 비긴보섬 박사는 ‘과학과 친숙하기 위하여’라는 슬로건아래 1958년, 오실로스코프를 사용한 테니스를 연상시키는 게임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게임의 이름을 명명하지는 않았다. 인류 최대의 비극을 낳았던 원폭을 개발한 과학자로서의 착잡함과 슬픔을 달래기 위함이었는지 박사는 즐거움을 위한 과학의 결정체인 게임을 만들어 낸다. 실로 독수리 5형제의 남박사 못지 않은 업적이라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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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실로스코프, 입력전압의 변화를 화면에 출력하는 장치의 일종
박사의 위대함이 여기서 그쳤다면 그저 그런 천재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며 필자가 ‘월리어천가’를 부르며 이런 기사에 그의 이름을 도배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영웅적인 용단은 게임에 대해서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박사가 근무하던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에서는 연구원들의 발명품 전부에 대해 특허출원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이때 월리 비긴보섬 박사가 디스플레이를 이용한 전자오락이라는 방식을 특허출원했다면 게임에 대한 원천기술이 미국에 귀속되어 그 이후의 게임제작은 크게 위축을 받았을 것이다. 박사는 이미 20여개의 특허를 보유한 사람이었지만 게임에 관해서는 특허를 출원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앞으로 나올 새로운 게임이 자신의 특허권으로 인해 개발이 중지되거나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홍익인간 정신의 발현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뭔가 새로운 것을 개발했다 하면 무조건 특허부터 내고 보는 게임업계의 추세와는 상반된 모습이자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보다는 게임산업의 발전을 염려하는 진정한 대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박사의 무한한 배려 덕분일까? 오늘날 게임산업은 무수한 파급력을 지니며 전 세계에 셀 수 없이 많은 게이머를 보유하고 현세대의 주력산업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커맨드 시스템을 자유롭게 풀어 준 캡콤의 용단
오락실을 가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많은 대전액션 게임이 있다. ‘철권’, ‘버추어파이터’, ‘킹오브파이터’, ‘스트리트파이터’, ‘드래곤볼’ 등등 그 시리즈는 역사도 깊으며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시리즈가 출시되기도 하고 명멸하기도 한다. 단시간에 승부를 내며 회전율이 높다는 이유로 오락실 주인들로부터 가장 효자종목으로 평가받는 장르이기도 하며 게이머들 입장에선 동전도둑으로 불리기도 하는 인기장르이다. 또 승부를 좋아하는 남성들의 심리를 잘 이용한 장르이기에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발전이 기대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위에 언급한 대전액션 게임들에서 한 가지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커맨드입력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커맨드입력시스템’이 뭔고 하니 ←↙↓↘→+K 이런 식으로 방향조작과 킥, 펀치 버튼 등을 조합해서 기술을 내는 시스템을 말한다. 특정 커맨드를 내면 특정 기술이 나가는 이 방식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대전액션게임 중에서 이 방식을 따르지 않는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보편화 된 시스템이다. 마치 모든 자동차에 핸들과 페달이 달려있는 것과 같은 보편성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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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권 10단콤보 역시 커맨드입력의 반복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대단한 시스템인 ‘커맨드입력시스템’을 만들어 낸 업계의 선구자이며 위대한 개척자는 누구일까? 바로 대전액션게임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스트리트파이터’를 만들어낸 캡콤이다. 그 어느 대전액션게임도 ‘커맨드입력’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특허를 내기만 했다면 기술사용료 수입이 엄청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 방식으로 특허를 출원하지 않았다. 과연 무슨 생각으로 특허를 내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사실 캡콤도 특허를 내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가만히 앉아서도 돈 벌수 있는 초대박 히트상품을 특허 안낸다고 하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지만 진정한대인배들의 마음가짐을 우리 같은 소인배들이 따라가기는 어려운 법.
“연작(連雀)이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랴.”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스트리트파이터2’를 개발한 진정한 대인배 니시타니 아키라 씨는 “제약을 걸면 그 방식을 이용한 다른 참신한 아이디어의 게임이 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캡콤 수뇌부를 설득한다. 이러한 설득에 캡콤의 수뇌부는 마침내 ‘커맨드입력시스템’을 천하만민의 공물(公物)로 만들며 특허내기를 포기한다. 이 용단은 대전액션게임장르가 황금기를 구가하며 그 전성기를 유지하는데 1등공신이 된다.
덕을 펴면 그 혜택이 돌고 돌아 결국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인지 그러한 용단을 내린 캡콤은 ‘스트리트파이터 2’로 게임센터의 90%이상을 점유하는 전대미문의 대히트를 기록하며 떼돈을 벌게 되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제작사로 게이머들의 뇌리 속에 굳건히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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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2, ←↙↓↘→이라는 입력방식은 '아도겐 쓰듯이 하면 돼.'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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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4, 대전액션의 황금기를 연 큰 형님이 돌아온다.
미스타 사카구치, 일본식 RPG의 교과서를 만들어낸 그의 결단
‘파이널판타지’ 하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RPG의 역사이자 신화로서 게이머들의 마음 속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드래곤퀘스트’만이 RPG 게임의 정석으로 통하던 시대에 새로운 방식의 RPG로 혜성처럼 나타나 도산직전의 스퀘어 사를 구한 ‘파이널판타지’가 빛도 보지 못하고 묻혀버릴 뻔 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파이널판타지’를 만든 사람은 게이머라면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히로노부 사카구치 씨이다. 만약 그의 스퀘어 입사가 좌절되었다면, 그가 스퀘어를 등졌다면 과연 ‘파이널판타지’가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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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에 대한 욕심보단 진정한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
80년대 스퀘어 사의 사장인 미야모토 마사시 씨는 사원공고를 내면서 당대로서는 거액인 시간당 1500엔을 보수로 내걸고 사원을 모집한다. 그러나 면접에서 미야모토 마사시 사장은 “실제로 1500엔은 줄 수 없다. 그러나 좋은 게임을 개발해서 벌어드린 금액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가 될 것.” 이란 황당한 떡밥성 멘트로 사람들을 아연실색케 한다. 낚였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사카구치 씨는 주저 없이 스퀘어에 입사한다. 그가 만일 돈만 바라는 개발자였다면 감동과 충격의 ‘파이널판타지’는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돈보다는 희망과 꿈을 좇는 그의 결단이 빛을 발한 것이다.
훗날 기자들이 “속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냐?”라고 묻자 그는 “처음에는 좀 엉뚱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특별히 속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계산을 해보니 게임을 만든 후 잘 팔리면 정말 그 정도 보수를 받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죠.”라며 그의 큰 그릇을 가늠할 수 있는 대답을 한다.
그의 입사 이후 스퀘어 사는 연속적인 실패로 도산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그 때까지 PC용 게임을 제작하던 사카구치 씨는 “한번만 내 방식대로 게임을 만들게 해 달라. 스토리가 있는 게임을 만들겠다. 이번에도 안 되면 게임계를 떠나겠다.” 며 일생일대의 도전을 시도 한다. 이른바 ‘막장’까지 몰렸던 스퀘어로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기에 그의 요청을 수락하고 마침내 완성된 게임에 기업의 사활을 건 마지막 작품이란 의미로 ‘파이널판타지’란 이름을 지어준다. 1987년 12월 18일, ‘파이널판타지’는 출시되고 그렇게 ‘판타지’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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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판1,2합팩, 52만장을 판매한 파판1은 훗날 2와 함께 당당 합본팩으로 출시된다
지금까지 게임 사에 길이 남을 만한 용단을 살펴보았다. 게임업계라는 곳이 워낙 최첨단의 업종이고 기술이란 것이 날로 발전하는 것이다 보니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서로 먼저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 바로 이쪽 업계이다. 그러다보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돌변하게 된다. 이런 마당에 동업자 정신이나 자기희생의 의미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사례를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 훌륭한 선례를 남기신 선구자들이 있으신 만큼 그들의 사례를 귀감삼아 이러한 용단을 내릴 개발자나 개발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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