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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온라인게임 10년, 그 영욕의 시간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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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한국 온라인게임 10년, 그 영욕의 세월

(上)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의 시대

 

게임메카는 창간 7주년을 맞아 한국 온라인게임의 태동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짚어보는 ‘한국 온라인게임 10년, 그 영욕의 시간’을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그 첫 번째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의 시대’에서는 1994년부터 서비스가 시작된 머드게임 ‘쥬라기 공원서’에서부터 2003년 ‘라그나로크’의 유럽시장진출까지의 과정을 짚어보았습니다.           

 

태동기(1994~1999)  ‘IMF 그리고 온라인 게임세대의 탄생’

Key Word: 바람의 나라, PC방, 스타크래프트 광풍, 리니지

국내 온라인게임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1994년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머드게임 ‘쥬라기 공원’을 시작점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정 데이터시스템에서 서비스한 ‘쥬라기 공원’은 PC통신 시절 분당 20원이라는 적지 않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매니아층을 형성할 만큼 인기를 끌었고 이를 기점으로 ‘퇴마요새’와 같은 머드게임들이 등장했다.

텍스트로 진행되는 게임방식 때문에 머드게임을 즐기던 게이머가 간첩으로 오해 받는 일도 벌어졌을 정도로 당시 온라인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무(無)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1996년에는 머드게임에 그래픽을 입힌 *머그게임 ‘바람의 나라’가 넥슨에 의해 정식으로 서비스 됐다. 김 진의 동명의 만화를 토대로 한 이 게임은 2007년 현재까지도 서비스가 지속될 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머드게임이 일부 매니아층에서만 향유되던 온라인 게임이었다면, 그래픽이 가미된 ‘바람의 나라’는 게임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온라인 게임’이라는 개념을 각인시킨 게임으로 평가 받고 있다. ‘바람의 나라’가 선 보인지 약 두 달 뒤 태울 엔터테인먼트에서 머그게임 ‘영웅문’의 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본격적으로 온라인 게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된다.    

*머드(MUD)게임: ‘Multiple User Dialogue’ 혹은 ‘Multiple User Dungeon’ 게임.

*머그(MUG)게임: ‘Multiple User Graphic’ 게임. 머드게임에 그래픽이 덧씌워진 형태.   

  

 

▲ 태초(?)의 온라인게임. 쥬라기 공원(위)과 바람의 나라(중간), 영웅문(아래)

 

 스타크래프트와 PC방 그리고 리니지   

1998년에는 한국 게임 역사의 흐름을 결정지을 두 번의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1998년 4월 발매된 ‘스타크래프트’는 한국의 PC방 사업을 폭발적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배틀넷을 이용한 멀티플레이의 재미를 느낀 게이머들은 고속 인터넷 전용선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PC방으로 몰렸고 ‘스타크래프트’ 발매 1년을 전후해 전국적으로 15,000여 개의 PC방이 생겨났다.   

같은 해 9월에는 엔씨소프트의 ‘리니지’가 정식 서비스에 들어갔다. ‘리니지’는 당시 머드게임+그래픽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 온라인 게임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마우스를 이용한 8방향 조작, 그래픽 등 기존 게임에 비해 획기적인 게임완성도와 안정적인 서비스를 특징으로 했던 ‘리니지’는 인터넷 회선의 확산과 더불어 급속히 퍼지며 서비스 개시 1년 만에 동시접속자수 1만 명 달성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는 공교롭게도 PC방이라는 한국 특유의 인터넷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98년 전국적으로 3000여 개에 불과했던 PC방은 1999년 15,000여 개 2000년 21,460여 개 2001년 23,548여 개로 증가하며 정점을 기록했다. 1998년을 기점으로 확산된 PC방은 그전까지 생소했던 ‘인터넷’, ‘온라인’이라는 개념을 정착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공간이었다.

특히 엔씨소프트는 ‘리니지’에서 PC방용 과금제를 도입하면서 가맹점 형태의 ‘리니지 PC방’들을 탄생시켰다. 이런 마케팅의 결과 자연스럽게 ‘리니지’에 노출된 PC방 사용자들이 늘어났고 1998년 서비스 초기 1천여 명에 불과했던 ‘리니지’ 동시접속자수는 2000년 10만 명을 돌파하며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온라인게임의 산업화와 ‘IMF사태’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1997년 IMF사태와 동시에 일자리를 잃은 젊은 퇴직자들이 PC방 사업에 눈을 돌리면서 전국적으로 PC방 창업붐이 일어난 것. PC방의 확산의 원인이 전적으로 IMF사태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지만 어느 정도 기폭제 역활을 한 것은 사실이다. IMF 사태로 인해 분출될 구멍을 찾지 못한 사회적 에너지가 ‘스타크래프트’를 계기로 한 쪽으로 쏠렸고 이를 적절히 이용한 ‘리니지’로 인해 한국 온라인게임산업의 씨앗이 싹을 틔운 셈이다.  

 

 

 ▲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는 한국 게임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들이다.

 

 

▲ IMF를 기점으로 우후죽순 늘어난 PC방은 온라인게임의 보급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약기 (2000년~2003년)  ‘중국대륙을 풍미한 한국 온라인게임, 그러나!’

Key Word: 중국, 3D, 부분유료화

2000년 3월 엔씨소프트의 코스닥 상장으로 21세기를 상큼하게 출발한 한국 온라인게임산업은 본격적으로 도약기를 맞이한다.

1999년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한 PC방 사업, 그리고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한 인터넷 문화 등 2000년대 초반에는 온라인게임산업의 질적, 양적 성장을 부추길 인프라들이 훌륭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1999년 30여 개에 불과했던 온라인게임업체들이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61개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사실은 당시 온라인게임에 대한 사업적인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단적으로 이야기해준다.        

이런 양질의 토양을 기반으로 ‘리니지’ 신화를 꿈꾸는 신생개발사들이 온라인게임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소프넷의 ‘드래곤라자’, 이야기의 ‘판타지포유’, JC엔터테인먼트 ‘레드문’, 액토즈 소프트의 ‘천년’, 시멘텍의 ‘헬브레스’, 위즈게이트의 ‘다크세이버’ 등이 2000년을 장식한 대표적인 온라인게임들이다. 이 시기 게임들의 특징이라면 수십억 대에 이르는 막대한 투자금 그리고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지역의 수출 등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철저한 검증 없이 서비스만을 서둘렀던 2001년 게임들은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드래곤라자’와 ‘판타지포유’는 초반 인기몰이를 유지하지 못하고 갈수록 추락을 거듭했다. 거창한 마케팅으로 과대포장 된 점이 없지 않았고 수출에 의존해 정작 국내 게임서비스의 질을 높이지 못한 것이 주요패인으로 꼽히고 있다.

 

▲ 위에서부터 '드래곤 라자', '판타지 포 유', '천년'. '리니지' 신화를 i아 성급하게 만들어진 게임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동접자수 50만, 중국으로! ‘차이나 드림’의 실현  

혼란스러웠던 2000년을 지나 2001년으로 접어들면서 한국 온라인게임은 양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1999년 20억 원 대였던 온라인게임시장은 2000년에는 1200억 원, 2001년에는 2000억 원 대의 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엔씨소프트의 ‘리니지’와 CCR의 ‘포트리스2 : 블루’같은 게임들은 각각 동시접속자수 10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서로 다른 장르에서 세력확장을 계속해 나갔다.

이 시기 한국 온라인게임산업의 주요 목표는 중국대륙의 공략이었다. 엄청난 잠재유저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대륙은 한국 게임개발업체들에게는 ‘꿈의 땅’이었다. 이 시기 한국은 온라인 게임에 있어서 상당한 개발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대륙에 진출하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중국 대륙으로 진출해 성공을 거둔 게임으로는 ‘미르의 전설 2’를 꼽을 수 있다. 위메이드가 제작하고 액토즈 소프트가 수출한 ‘미르의 전설 2’는 동시접속자수 50만을 기록하며 ‘차이나 드림’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하지만 ‘미르의 전설 2’는 후에 위메이드와 샨다, 액토즈소프트 사이의 법정다툼을 불러오기도 하는 등 불명예를 안기도 한다.

‘미르의 전설 2’의 공동제작사로 이름을 올린 액토즈소프트가 중국 기업인 샨다에게 인수되고 이 과정에서 샨다가 ‘미르의 전설 2’를 표절한 ‘전기세계’ 제작하며 저작권과 관련한 문제가 불거졌던 것. 2003년 위메이드에 의해 제기된 ‘미르의 전설 2’ 지적재산권침해 소송은 2007년 2월 당사자들끼리 합의하기까지 4년 동안 지속되면서 게임관련 국제분쟁사례에 선례를 남겼다.   

 

▲ 게임물 저작권 국제분쟁에 선례를 남긴 '미르의 전설 2'

 

 

자본 유입에 따른 부작용, 3D 온라인게임의 시대 도래,

2001년을 지나며 온라인 게임의 양적인 성장은 계속 이어졌지만 내실의 성장은 그만큼 따라와 주질 못했다.

‘리니지’의 연승행보에 자극 받은 개발사들은 유행처럼 특징 없는 MMORPG를 양산해내며, 장르의 편중, 게임성 부족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온라인게임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쯤으로 인식되면서 무분별한 투자가 이루어졌고, 안목 없는 자본에 의해 게임의 완성도와 게임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됐다.            

포스트 ‘리니지’를 꿈꾸었지만 완성도와 게임성을 갖추지 못한 게임들은 시장에서 퇴출될 수 밖에 없었고, 개성 없는 게임들이 난립할수록 한국 온라인게임산업의 내적 성장은 더뎌졌다. 2001년 말 온라인게임의 전체매출은 약 2,000억 원 중 약 1,200억 원이 ‘리니지’의 단일 매출이었다는 사실은 한국 온라인게임의 내적 부실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 잘 보여준다.  

2002년으로 접어들면서 3D 표방한 온라인게임들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웹젠의 ‘뮤’를 필두로 나코인터렉티브의 ‘라그하임’, 프리스톤테일(지금의 예당온라인)의 ‘프리스톤테일’ 등 3D MMORPG가 줄줄이 등장했다. 이 밖에도 ‘크로노스’, ‘릴온라인’, ‘샤이닝 로어’, ‘엔에이지’, ‘씰온라인’, ‘A3’, ‘프리스트’ 같은 3D MMORPG들이 2002년을 수 놓았고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리니지2’가 그 방점을 찍었다.

이 시기에는 해외 온라인게임의 한국시장 진입이 두드러졌지만 그 성과는 썩 좋지 못했다. ‘에버퀘스트’, ‘다크에이지오브카멜롯’, ‘애쉬론즈콜 2’ 등 유명 개발사나 개발자에 의해 제작된 온라인게임들이 한국시장에 도전했지만 결국 얼마 못 가 서비스를 종료해야 했다. 이 때부터 뿌리깊게 박힌 “해외게임은 한국에서는 안 된다.”라는 통념은 ‘월드오브워크래프트’가 전세계적으로 메가히트를 치기 전까지 지속된다.

 

 

▲ '다크에이지 오브 카멜롯'. 한국에서 큰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라그나로크의 세계를 향한 도전, 부분유료게임의 정착

2002년과 2003년 사이 많은 게임개발사들이 자신 있게 해외시장을 두드렸고, 이 중 몇몇은 해외진출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어냈다.

해외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올렸던 게임으로는 그라비티의 ‘라그나로크’를 꼽을 수 있다. 2002년 상용화를 진행한 ‘라그나로크’는 같은 해 대만, 일본 진출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으로 진출해 현재 51개국에서 서비스되고 있다. 2005년 일본 소프트뱅크사 계열의 겅호에 인수되면서 한국업체로서 의미는 퇴색됐지만, 그라비티의 해외진출은 여전히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라비티는 2007년 두바이에 지사를 설립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3년에 들어서면서 ‘리니지’, ‘뮤’, ‘라그나로크’ 등 이미 시장을 선점한 온라인 게임을 제외한 나머지 게임들은 저조한 수익성으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많은 게임들이 무료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오픈베타테스트 기간을 길게 잡아 접속자수를 늘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개발사들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오픈베타테스트 기간에만 게임을 즐기고 상용화에 들어가면 게임을 그만두는 소위 ‘오베족’을 양산해냈다.  

이런 상황의 반복은 업체들로 하여금 게임의 상용화를 포기하고 무료화를 단행하도록 했으며, 오픈베타테스트에서 확보한 유저들이 게임아이템만 별도로 구매하게 만드는 부분유료화과금시스템을 정착시켰다. 부분유료화는 현재 미국, 유럽, 중국 등 타지역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과금형태이지만, 당시에는 정액제 게임으로는 수익을 내지 못하던 업체들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채택할 수 밖에 없는 차선책이었다.

그리고 2003년 10월 블리자드 사의 첫 MMOPRG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직배가 공식적으로 발표되면서 한국 온라인게임산업은 큰 변화를 눈 앞에 두게 된다.             

잠깐! 뒷 페이지에 한국온라인게임사(1994~2003)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연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참고자료]: 게임메카, PC파워진, 대한민국 게임백서

 

 

▲ 해외진출에 선례를 남긴 '라그나로크'.

 

 

한국 온라인게임 10년, 그 영욕의 세월 (下) 예고

2004년 3월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클로즈베타테스트가 시작되면서 한국 온라인게임계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높은 게임성에 자극을 받은 국내개발업체들은 나름대로 대작이라 불리울 수 있는 MMORPG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긴다.

한편 한쪽에서는 개발사에서조차 반신반의 했던 ‘카트라이더’가 돌풍을 일으키고, 아이템 현금거래 부작용 등 온라인 게임의 역기능이 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제시되기 시작한다. 또 영세한 개발자 혹은 개발사들은 도박의 기능이 강화된 사행성게임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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