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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아십니까! 대한민국 대표 개발자들의 춥고 배고팠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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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의 로망을 이끌던 남자 - 손노리 이원술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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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기획기사에 99.9% 들어맞는 사람이 바로 손노리의 이원술 대표이사(이하 이대표)다. 그는 국내 PC 게임시장의 굴곡을 모두 경험한 개발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세대로서 ‘춥고 배고팠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실으려면 한 페이지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필자는 일주일에 다섯 끼 이상을 라면으로만 해결했다는 이대표의 추억담을 듣기 위해 새롭게 강남으로 이전한 손노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파워진: 대표님, 라면 먹던 시절 이야기나 들어볼까 해서 왔지요. 이번 호 특집기사거든요.
이대표: 나 아침에도 라면 먹었는데, 라면 먹던 얘기는 왜? 내가 지금 뽀빠이를 너무 많이 먹은 관계로 속이 쓰려서 라면은 됐고 쌀국수나 먹으러 갑시다.

 

이원술 대표가 말하는 그때 그 시절

- 첫째 에피소드. 오늘부터 우리는 신의 아들이다
일주일에 여섯 번은 라면을 주식으로 삼아야 했던 지하실과 옥탑방 시절에 건강이 너무 악화돼서 요양을 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인즉슨 탁하고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의례히 걸렸다고 생각했던 감기가 한달이나 지속되길래 검사를 받아보니 결핵이었단다. 당시 손노리 팀의 단 2명만 제외하고 건강악화로 인해 입대를 할 수 없었다고 하니 사무실 환경이 얼마나 나빴는지 짐작 가는가? 그렇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원술 대표는 “그때 고생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성공해 자리를 잡고 있으니 다 잘된 일이다(?)”라고 말한다. 개발자의 생활과 건강은 반비례의 곡선만 그리던 시절, 그 시절의 이대표는 그저 긍정적인 사고로 매사를 즐기는 방법이 최선이었다고 회상했다.

 - 둘째 에피소드. 개발자에게 사랑은 사치스러운 것?
<포가튼 사가>의 개발기간은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 팀원들은 게임개발에 매달려 여자친구가 있던 사람들까지 <포가튼 사가> 개발기간 동안 줄줄이 헤어졌다고 한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성공은 차기작에 대한 부담을 한층 가중시켰고 더욱 심혈을 기울이기 위해 하루하루 늘어간 개발기간 때문에 사귀던 사람과의 만남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 오죽하면 아직까지 <포가튼 사가>의 표지만 봐도 가슴이 저리다는 프로그래머가 있다고 할까? 당시에 게임을 하나 만들고 시장에 내놓는 것은 살얼음판에 벌어지는 진검승부와도 같았기 때문에 사랑과 병행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작업이었노라고 회고했다.

 - 셋째 에피소드. 쓰러져가는 패키지 시장을 붙잡으려 했으나
이원술 대표는 손노리가 패키지 게임 개발사로서 어느 정도 위치를 굳혔을 때 한국의 PC 패키지 시장이 점차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시간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고 밝혔다. “시장은 커졌다고 하는데 패키지 게임을 내놓을 때마다 판매량은 줄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0만장을 팔았는데 그 다음에 나온 <포가튼 사가>가 8만장을 기록하더니 <악튜러스>와 <화이트데이>에서는 아예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고 회고하며 그래도 온라인 게임으로 노선을 변경하려고 했을 때 끝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플래너스에서 손노리가 독립하고 같은 팀이었던 서관희 이사도 엔트리브 소프트로 분사되는 시기에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과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팀원들과 헤어져야 했던 순간이 지금까지 가장 큰 상처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원술의 로망

손노리와 이원술 대표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은 ‘손노리’라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손노리식 개그가 최고!’라는 익숙한 문구로 다가오지만 이러한 칭호를 얻기 까지는 수많은 눈물과 라면이 소비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독자들도 알게 됐으리라.

아직도 이대표는 라면을 즐겨 먹고 온라인 게임보다는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인칭 PC 게임이나 오락실 게임을 좋아한다. 그래서 오락실 슈팅 게임의 재미를 그대로 살리려는 시도로 MO 게임을 개발중에 있고 그토록 어려움을 겪었던 패키지 시장에 다시 ‘패키지의 로망’이라는 PC 패키지 상품을 선보인다. 필자는 어려운 시절을 꿋꿋하게 헤쳐나온, 또 이렇게 새로운 패키지로 팬들에게 다가서려는 손노리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다. 독자들도 일동 기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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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손노리 팬이 사무실로 보낸 거에요. 맛있네”


힘든 시절의 든든했던 동료들이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웹젠 김남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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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게임이 좋아 3D 그래픽을 배워 게임판에 뛰어든 남자. 스타워즈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자. 세 명의 개발인원으로 전세계 6개국에 서비스되는 게임을 만들어낸 신화의 장본인. <뮤 온라인>의 개발사인 웹젠의 대표이사 김남주의 게임 인생을 들어보자.

김남주 대표가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하이텔 아마추어 게임 동호회에 가입한 후 처음 빛을 본 게임이 있었다. 그가 20대 중반이던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994년, 한달 정도 기획안을 완성하고 그래픽 작업까지 끝낸 게임을 자료실에 올려놓은 것을 본 미리내소프트웨어에서 연락이 와 결국 그 게임, <이즈미르>를 파는 데 성공했다. 당시 천만원에 가까운 돈을 받을 수 있었던 김남주 대표는 ‘야, 게임이란 거 별 거 아니네’라는 소위 ‘만만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지나서였다.

이후 군대에 끌려 갔다가 사회에 복귀하면서 같은 동호회 출신이었던 조기용 현 웹젠 상무(클라이언트 담당)와 의기투합해 게임을 만들게 되었다. 나중에는 송길섭 현 웹젠 이사(서버 담당)가 합류해 총 세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웹젠을 창업하고 <뮤 온라인>을 만들기 직전의 이 2년이 김남주 대표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되었다. 그는 이 기간을 ‘삽질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무작정 시작한 게임 개발이었지만 정말 힘든 작업이라는 것도 느꼈고 그만큼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몇 개월 동안 열심히 작업하다가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가 만든 것보다 훨씬 나은 내용의 게임들이 등장해서 다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고, 이러한 작업이 지루하게 2년 동안 계속되었어요. 세 명이 각각 자기 집에서 작업하고 그것을 PC통신 등으로 서로 교환하거나 전화통화로 회의를 하는 방식이 계속되었는데, 그때 6개월 동안 집밖으로 한번도 나간 적이 없었던 시절도 있었죠.”

그때 6개월 동안 집안에 있으면서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을 보고 어머님께 “수염이 멋있으니 기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20대 중반의 한창 나이에 집안에 틀어박혀 게임이라는 물건을 뚝딱거리고 만들고 있으니 부모님들의 속이 얼마나 상하셨을까. 김남주 대표는 “부모님께서 농담까지 건네시면서 내색하지 않으셨던 것이 더 부담으로 작용했고, 그만큼 더 노력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2년 동안 세 개의 게임을 만들었지만 제대로 된 결과물은 하나도 없었다. 혼자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답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과정 자체는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그 괴로움을 공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더구나 다른 부분보다 작업량이 많았던 그래픽 작업을 혼자 했기에 고통은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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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절

하지만 그 후 하늘이 도왔는지 그 자신이 미리내를 통해 게임개발에 입문했고 조기용 상무 및 송길섭 이사도 미리내에 몸담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수영 전 사장을 설득하는데 성공, 웹젠을 창업해 <뮤 온라인>을 개발하게 되었다. 클로즈 베타 때부터 유저들과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토대로 개발해나가던 시절도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시기였다. 애초 온라인 게임에는 끝없는 업데이트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했기에, 거의 24시간 서버와 컴퓨터 앞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이어진 것.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주일이 한 달, 한 달이 두 달이 되는 과정, 유저들의 레벨업 속도를 미처 쫓아가지 못하는 업데이트… 등의 과정이 연속되는 동안 세 사람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김남주 대표는 “2년 동안의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내가 재미있는 게임이 아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또한 개개인의 능력이 조금씩 더해져 훌륭한 게임이 되는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특출한 능력 때문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또한 느끼게 되었습니다. 힘들었을 때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동료들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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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 <이즈미르>의 개발 당시 게임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골몰하던 중, 세계지도를 펴놓고 눈감고 찌르는 방법을 선택했다. -_-; 처음 찍은 곳은 발음이 안 좋아 패스, 두 번째 역시… 이런 식으로 어감이 좋을 때까지 반복하던 중 결국 중동의 ‘이즈미르(터키의 지명)’가 선택된 것이라고. 특별히 중동으로 선택한 이유는 전세계 분쟁의 중심지가 항상 중동이었던 만큼, 이 지역을 선택하면 세계전쟁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기원(?)에서였다고 한다.

에피소드 #2. 웹젠 시절. 일본 유명 게임업체 S사 소속 스튜디오의 개발진들이 사무실을 방문했다. <뮤 온라인>의 컨셉과 게임을 보여주었더니 자꾸만 게임의 기획안과 시나리오를 요구하는 것이다. 김남주 대표(당시 그래픽 담당)가 ‘이 게임의 컨셉은 이렇고, 이 게임이 온라인이므로 지금 없는 부분은 유저들과 함께 상의해서 만들어나갈 것이다’라고 설명하자 대뜸, ‘당신들, 이 게임 안 만드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해 정신적 대미지 200% 작렬. 하지만 후에 홈페이지에 스크린 샷을 올리자 유저들로부터 ‘너희들, 이거 편집한 거지?’라는 식의 반응을 듣고 다시 기운을 얻었다고(?) 한다.

에피소드 #3. 개발 당시 서로의 시간을 뺏지 말아야 했기에 직접 게임에 접속해 에디트하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저장은 <PrtScr> 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접속해서 새로운 월드에 나무를 열심히 심고 있었는데 한 유저가 다가와, “영자님 뭐하세요?”라고 물었다. “아 지금 누구 기다리는 중이에요”, “아 그러세요. 즐뮤요~”하고 지나갔다. 조금 있다 보니 초보 법사 한 명이 지나가면서 “드라큘라가 온다~!”라고 소리치고 가버렸다. 그런데 바로 어떤 캐릭터가 오더니 김남주 대표의 캐릭터를 PK하고 가버리는 것이다. -_- 아이디를 보니 조금 아까 법사 캐릭터가 말한 ‘드라큘라’였던 것. 마을로 환생하고 ‘아, 아까 작업한 것 저장을 안 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다시 그 장소를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20분 동안 작업한 게 다 날라간 것. 그 순간 순식간에 개발자 마인드에서 유저 마인드로 변해 드라큘라를 찾아 20분 동안 헤매고 다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게임에 접속하지 않아도 작업할 수 있는 전용 에디터를 조상무에게 요청해 받은 것이 ‘남주형’ 버전 에디터였다. ^^


장모님의 눈물 - 그리곤 조병규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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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년이 제게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사무실 임대료, 국민연금, 의료보험, 전기료 같은 세금이 모두 연체되었지만,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월급만은 제때 지급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공단에서 ‘너희 사업장에서 이런 걸 안 냈는데 알고 있냐?’라는 전화를 받은 직원들은 ‘이상하다? 월급은 제때 나오는데?’라고 당황해 했지요.”

게임개발 기간이 늘어나 출시가 자꾸 늦어지는 만큼 투자되는 돈도 많아져 자가용 등 개인적으로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어렵사리 회사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에 더불어 그리곤 직원들은 마이너스 대출이나,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같은 것을 이용, 회사를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사실 그 당시 저와 직원들만 고생했던 것이 아니라 식구들도 함께 고생했는데, 집사람은 지갑 속에 교통카드만 들고 다녔고 보일러 기름 넣을 돈이 없어 온수나 따뜻한 방은 생각할 수도 없었죠. 하루는 퇴근해서 집엘 갔더니 장모님이 와서 서글프게 울고 계셨는데 왜 그러시냐고 여쭤보니, 집사람이 웬일로 처갓집에 와서 밥을 먹길래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우리집에 와보니 쌀이 한 톨도 없다는 겁니다. 밥 한끼 해먹을 쌀이 없었으니….”

 

흡연자에게는 쌀보다도 중요한 것

여기까지 듣던 필자는 말 그대로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현재의 그리곤은 <씰 온라인>을 통해 국내와 일본 및 대만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했지만, 패키지 게임을 개발하던 시절 조병규 사장의 지난날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_-;;;).

“200//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년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월 차일피일 출시를 미루던 게임으로 인해 결국 새해 첫 달부터 월급을 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마케팅 이사로 있는 김동준 씨는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여서 제 힘든 주머니 사정을 알고 하루에 담배 한 갑씩을 사주었죠. 평소 하루에 담배를 두세 갑씩 피우는데, 이 한 갑을 다 피고 나면 담배가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직원들에게 얻어 피웠습니다. 하지만 직원들도 처음엔 잘 주더니, 점점 자기 사정이 힘들어지니까 주머니에 담배가 있어도 잘 안주는 겁니다. 이럴 때는 일부러 직원들과 함께 게임을 했지요. 한참 집중해서 게임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는 직원들이 있는데, 그러면 바로 다른 동료들의 집중공격을 받는 거죠. 참 치사하죠(^^)? 하다 못해 담배가 아무도 없을 때는 재떨이를 뒤져서 피다 남은 담배 꽁초를 주워 직원들과 함께 피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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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다!!!!!!!

 

직원들이 있기에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급을 주지 못한 채 2월이 됐는데 설 연휴가 있는 겁니다. 월급날이 몇 일 안 남았는데, 마침 돈을 받을 업체가 있었고 그걸 받으면 직원들 월급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야! 이달에는 월급을 열흘 일찍 줄게!’라고 큰소리를 쳤지요. 그렇게 밖으로 나서는데 "사장님 파이팅! 돈 구해오세요!"라며 박수까지 치는 직원들을 보니 ‘많이 배고프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솔직히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업체 관계자와 저녁식사 중 시비가 붙게 되었고 당시 3//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살이었던 제게 ‘나이도 어린 놈이!’하면서 멱살을 잡길래 오기가 생겨 주먹다짐을 하려던 순간, 직원들이 제게 박수를 보내며 ‘사장님 돈 구해오세요!’라고 했던 생각이 나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잘못했던 것은 없는데, 식사중 마셨던 술이 과해 술주정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뒤늦게 김동준 이사가 찾아와 근처 포장마차에서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동전은 커녕 먼지만 날리는데 얼마나 서글프던지…. 그 친구도 주머니에 있는 돈 다 모아서 소주 한 병에 떡볶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죠.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인분도 아니고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000원어치 시켜놓고 말이죠. “

이 얼마나 가슴 아픈 과거인가? 쓸 때 없이 눈물 흘리게 하는 저녁시간의 드라마나 우정의 무대에서 어머니를 만날 때보다! 더욱더 삶의 애환을 그린 조병규 대표이사의 지난날은 본인 스스로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결코 웃으면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병규 사장이 받은 최고의 생일선물

200//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년, 어려웠었던 시절에 생일을 맞이하게 된 조병규 대표이사. 조그만 선물이나 이쁜 그림 엽서 조차 살 돈이 없던 직원들은 B4 종이에다가 한마디씩 적어 선물로 전했다고 한다. ‘사장님 힘내세요! 배고파요! 밥 사주세요!’ 등. 어쩌겠는가? 배고픈 직원들의 대장인 그는 그당시 연체되지 않았던 유일한 신용카드로배고픈 어린 양들에게 고기나 실컷 먹이자는 심정으로, “어차피 난 이 카드 막을 수 없으니 기왕 먹는 김에 소고기로 하자! 실컷 먹어!”라고 했더니 70만원 정도 나왔다고 한다(나중에 이 70만원을 갚느라고 엄청나게 고생했단다). 그는 인터뷰의 마지막을 어려웠던 시절에 직원들이 보여줬던 신뢰와 믿음이 지금의 그리곤을 있게 했다는 말로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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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에는 영양보강 달걀 하나! - 소프트맥스 최연규 실장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PC용 롤플레잉 게임의 대명사라고 하면 <창세기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창세기전>을 대표하는 이가 바로 소프트맥스의 최연규 실장이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처음부터 풍족한 개발자 인생을 살았을까? 춥고 어두운 지하실 시절. 라면이라면 신물이 나게 먹었던 그 시절을 거쳐 이제는 해외 게임시장에도 통할 수 있는 국산 최초의 PS2용 롤플레잉 게임 <마그나카르타: 진홍의 성흔>을 내놓은 그를 찾아 어렵던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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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규 실장은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의 초창기 PC통신 동호회 출신의 개발자다. ‘최개굴’이란 필명으로 PC 파워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던 콘솔 게임전문지 게임챔프의 필자를 92년도부터 시작했던 그는 비디오 게임기의 마니아로서 뜻이 맞는 인물들과 만나 하이텔 게임기동호회를 창설했다. 현재 소프트맥스의 조영기 개발이사는 이 동호회의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대 시삽이었으며, 전석환 그래픽 팀장 등도 역시 게임기 동호회의 창설 멤버였다. 이들이 게임 개발에 대한 뜻을 안고 모이게 된 것은 하이텔 3대 동호회에 들 정도로 큰 규모로 성장했던 게임기동호회의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주년 기념 대모임 때였다.

“대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조영기 이사 집의 옥탑방에서 합숙하며 여러 가지 대모임 관련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중 ‘게임을 한번 개발해보자’ 라는 마음에 의기투합하게 됐습니다. 그때 이미 조영기 이사는 게임 몇 개를 ‘말아먹은’ 상태였으며 다른 이들은 게임 개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은 없던 상태였습니다.”

이들이 처음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MSX용 <메탈기어>의 IBM-PC용으로의 컨버전이었지만 그 프로젝트는 오래가지 못했고 그 후로도 롤플레잉 게임, 슈팅 게임 등등 여러 가지 게임을 기획했으나 모두 중단되었다. 이후 <라그나로크 온라인>을 개발한 현 IMC게임즈 김학규 이사를 PC통신을 통해 만나게 되었고, 합심한 그들은 소프트맥스의 첫 타이틀이 된 <리크니스>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들이 잠시 묵었던 곳은 논현동에 위치한 김학규 이사의 집 지하실이었다고. 하지만 김학규 이사가 병역특례로 인해 게임개발에 더 이상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고, 최연규 실장 등 현 소프트맥스 팀은 분해될 위기에 이르렀으나 하지만 정영희 사장(현 소프트맥스 사장)을 만나면서 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주식은 농X 육개장 사발면이었습니다. 게임 개발에 먼저 뛰어든 선배들이 가끔 우리 작업실에 라면과 계란 한판을 사오곤 했었기 때문이죠. 소프트맥스가 자리를 좀 잡은 이후에도 최고의 식사는 한X 도시락이었습니다. 천원도 안 되는 가격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좋았죠”

사발면에 계란이 필요한 이유는 영양 보충을 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_-). 어쨌든 이후 소프트맥스를 정식으로 설립하게 되면서 그들은 그나마 사무실이라도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돈은’ 없었다. <창세기전 3> 시리즈를 만들던 시절까지도 국내 게임업체 중에서는 가장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소프트맥스가 코스닥 시장에 등록하기 전까지는 게임 출시 당시에만 조금 살 만했고, 여전히 배고픈 삶이 이어졌다.

“첫 월급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약 3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그 전에도 돈을 받긴 했지만 한 달에 몇 만원 수준인 용돈에 그쳤죠. 제대로 된 봉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역시 소프트맥스가 코스닥에 등록하면서부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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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맥스의 첫번째 게임 리크니스. 후속작인 스카이&리카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웬만한 게임 개발사는 회사에 숙직실을 두고 있는 것이 생각나 과거 숙직실에서 있었던 재미있던 기억들에 대해 물어봤다.

“사실 98년까지는 숙직실이 따로 없었어요. 그냥 회사 지하실 쪽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정도였죠. 그런데 <창세기전: 템페스트>를 개발하고 있던 어느 날 지하실에서 잠을 자다가 회사에서 불이 나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일어나서 보니 지하실에 진짜로 불이 났더군요. 사장님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근처 민가에 하숙방을 얻어서 직원들을 재우곤 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예전처럼 배고픈 상황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가장 어려웠을 때는 돈 없고 배고팠을 때보다 <마그나카르타>로 인해 게이머들에게 불신을 받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국내 최초의 PS2용 롤플레잉 게임 <마그나카르타: 진홍의 성흔>을 발매, 일본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콘솔용 게임을 좋아해서 시작한 게임 개발이 드디어 일본 본토의 시장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지금까지의 몸고생과 마음고생을 깨끗이 씻어줄 수 있을 것이다.


"에이, 사발면은 사치에요" - NC소프트 정무식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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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NC소프트 개발3실 게임디자인팀 소속이며 한국게임개발자협회(KGDA)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정무식 과장. 그가 처음 게임개발에 뛰어든 때는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994년 겨울이었다.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그는 패밀리 프로덕션에서 기획실장을 맡고 있었던 김문규 사장(현 트리거소프트 대표이사)와 함께 ‘게임을 만들어보자’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출발했던 것.

“사무실을 찾기 위해서 싼 자취방이 많은 인천대학교 근처를 헤매다가, 변두리에 있는 한 주택의 가장 조그만 방을 얻었지요. 처음에는 그 조그만 방에 책상 두 개와 컴퓨터 두 대를 달랑 가져다 놓고 게임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가져간 컴퓨터가 아마도 제가 집에서 쓰던 286 AT였을 겁니다. 하지만 어려웠던 상황과는 달리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고, 세계로 나아가자는 취지로 ‘트리거’라는 회사 이름을 제가 제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청난 히트작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독일, 대만, 미국 등 여기저기에 게임을 수출해서 외화를 벌었으니 제가 지은 이름이 헛된 것은 아니겠지요(^^)?”

 

인천에서 제일 싼 방은 어땠을까?

하지만 원대한 꿈과는 달리 트리거소프트의 시작은 정말로 빈궁한 나날들이었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무엇보다 전체인원이 두 명뿐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막막한 첫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6개월 뒤쯤에는 그래픽 디자이너 두 명을 충원하면서, 다른 회사와의 협력작업 형태로 <인 투 더 썬>, <라스트 레이버즈>, <충무공전> 등의 타이틀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래도 배고픈 나날은 끝날 줄을 몰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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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6평 오피스텔(실 평수 8평)에서 4명이 일하는데, 중앙냉난방식이었기 때문에 여름에는 선풍기 하나로, 겨울에는 지금 돈으로 3만원 정도인 전기난로 하나로 버텼지요. 저녁에 야근을 끝내고 회사에서 잘 때는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인용 침대에 제가 집에서 가져온 전기담요를 깔고 4명이 각자 의자에 발을 걸친 다음 가로로 누워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어떻게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인용 싱글 침대에 4명이 자냐?’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닥치면 다 자게 됩니다(^^). 생각보다 꽤 넓게 잘 수 있어요. 물론 그 중에 한 명이라도 위생이 청결치 않으면 전체가 고생을 하게 되지만 말이죠. 문제는 이후 한 명이 더 늘어 5명이 되었을 때였는데, 그것도 덩치가 무척 큰 분이었거든요. 그 이후로는 상당한 여러 애로사항이 꽃피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군용 모포’ 같은 레어 아이템이 새로 필요하게 됐죠.”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인분의 반찬으로 4명이 식사를!

2명으로 시작한, 그것도 당시에는 낯설기 그지 없는 ‘게임’이라는 직종의 회사가 얼마나 어려웠을 지는 충분히 예상이 간다. 사무실 형편이 이토록 어려웠는데 월급이나 식사라고 나을 것은 없다.

“사실 사발면도 호강이죠. 그 당시에 저희는 집에서 들고 온 전기 밥솥으로 밥을 짓고, 아는 식당에 찌개와 반찬이 나오는 식사를 //cdn.gamemeca.com/gmdata/0000/124/324/인분만 시켜서 그것으로 4명이 달려들어 밥을 먹었습니다. 그때 꽤 오랜 기간 그렇게 식사를 때웠는데, 배달해주시던 아주머니가 처음에는 아주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시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저희가 불쌍하다며 이것저것 챙겨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어느 날에는 회식으로 뭔가 특별한 것을 먹어보자며 벼르고 별러서 찾아갔던 것이 바로 근처의 ‘순대국밥' 집이었는데, 지금도 그 순대국밥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이후로 순대국밥은 여전히 제겐 가장 화려했던 회식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종종 순대국밥을 점심 메뉴로 챙겨먹곤 합니다. ^^”

“약 2년간은 전혀 월급을 받지 못했고 그 후로 또 2년간은 한 달에 20만원씩을 받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리거소프트는 <충무공전> 이전까지 크게 주목 받지 못하던 회사였고, 또 솔직히 그 당시는 게임 자체가 희귀한 실정이었으니까요. 여러모로 다들 어려웠던 때라고 생각됩니다. 99년 코스닥 투자 붐이 일기 전까지는 다들 그랬을 거에요. 함께 일하던 그래픽 디자이너는 돈 때문에 새벽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는 학교 수업을 모두 포기하고 게임 개발에 매진했었지요.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서 뭐든지 포기하고, 또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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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경험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힘든 시간 속에서도 트리거소프트는 <장보고전>, <충무공전 2>, <퇴마전설> 등을 꾸준히 히트시키면서 게임업계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던 중 그는 좀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기 위해 현재의 직장인 NC소프트로 자리를 옮겨 열심히 <토이스트라이커>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 한국게임개발자협회 회장인 그는 후배들을 위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아직도 중소규모 업체나 아마추어 팀들은 많은 고생을 하는데, 어떤 일이든 고생 없는 성공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고생을 트레이닝으로 생각하고 팀웍과 노력을 바탕으로 즐기면서 극복하셨으면 좋겠네요. 고생을 많이 해야 나중에 이런 인터뷰에서 할 얘기가 생기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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