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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특집] 에어컨 없는 서민을 위한 최고의 공포체험! 언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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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공포 언다잉. 그 저주 받은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공포영화는 '공포'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각을 건드리는 매체이기 때문에 영상이 아주 빼어나야 하고, 그 내용이 허술하면 공포를 줄 수 없기 때문에 완성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장르다. 그래서인지 더위가 찾아올 때면 필자는 어렸을 적부터 TV 앞에 앉았다. 모터보트에 버금가는 76년산 선풍기의 소음을 듣기도 싫었거니와 은행이 아니고선 에어컨 한번 제대로 쐬어보기 힘든 서민이었기에 유달리 공포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_-;


         ▶ 필자의 애청프로그램 '전설의 고향'

전설의 고향을 시작으로 외화, 방화(?), 소설에 이르기까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온갖 무섭다는 물건은 죄다 뒤지고 다녔던 필자는 어느새 학교에서 귀신을 부른다는 분신사바 놀이까지 주도하며 어둠의 숭배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늦은 귀가길이 두려운 경험도 없지 않았으나 찌는 더위 속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짜릿한 오싹함이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여름의 탈출구요, 호러 마니아들의 로망이로니… 그것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마약에 가까운 유혹이었다.

공포에 대한 풀리지 않는 갈증은 게임에까지 이어졌다.

중학교시절 잔혹무쌍 슬래쉬고어게임인 '엘비라'에 심한 충격을 받았던 난 이윽고 어둠 속의 나홀로, 드라큐라 언리쉬드, 다크시드, 악의 요산, 가브리엘나이트 등 온갖 타이틀을 뒤져가며 포만감을 채우기 위해 잡식을 거듭하다 급기야 호러물에 대한 면역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 필자의 호기심은 귀신을 부르는 놀이에까지 이어졌다 -_-;

그것은 분명 90년대 후반부터 바이러스처럼 퍼진 탈장르 유행 때문이었다. ‘스크림’ 이후 청춘시트콤으로 변해버린 공포영화와 ‘바이오하자드’ 이후 액션인지 호러물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는 공포게임의 유행일변도는 공포를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위력을 자랑했다. 물론 지금은 근원적인 공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 빛바랜 오싹함이 되살아나고 있지만 당시 불었던 유행은 처녀귀신조차 옆집 아주머니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던 것이다.

▶ 스크림과 바이오하자드는 내 공포불감증의 주원인이었다

 

 

때는 격동의 90년대가 지난 21세기 무렵. 호러물의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필자의 공포게임불감증을 해소시켜준 작품은 결국 등장하고야 말았다.

그 이름하여 「클라이브 바커의 언다잉」심오한 척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즐기던 가브리엘나이트, 무늬만 공포지만 온통 ‘세균전’ 퍼즐게임으로 점철된 7번째 손님, 어설픈 연출의 연속으로 마치 고등학교 연극무도회를 보는듯한 판타스마고리아 등 수많은 호러게임에 고개를 내저었던 필자는 언다잉을 접한 이후 공포물에 생겼던 면역항체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었다.

비록 이번 연재가 크게 알려지지 않은 납량명작(?)을 소개하는 코너이긴 하나 게임 ‘엘비라’를 즐기며 느꼈던 그 짜릿함, 방화 ‘여곡성’과 ‘월하의 공동묘지’를 보며 느꼈던 오싹오싹 공포체험을 되살려준 언다잉 역시 충분히 연재의 대열에 합류할만하다.

그래서 이번엔 높은 게임성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성적을 남긴 비운의 작품 ‘언다잉’을 새로운 각도로 재조명해 보고자 하니 부디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시청을 부탁한다.

언다잉에 '사다코'의 망령은 없다
비디오테잎 바이러스 '링'의 폭풍이 불어 닥친 후 최근 영화와 게임가엔 죄다 TV에서 갓 기어 나온 듯 한 '사다코'의 망령만이 판을 치고 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초점 없는 눈동자로 관객을 응시하는 눈… 이젠 코미디를 보는 듯 웃기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지만 관객과 게이머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데 이만한 수단은 없기에 사다코 스타일의 귀신은 수많은 매체에서 활용하는 단골배우가 되버렸다(최근 등장한 영화 ‘령’과 PS2용 게임 ‘구원’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 사다코! 이젠 지겹단 말이다!

자고로 공포란 이러한 자극적인 효과가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긴 하나 충실한 연출과 스토리라인 그리고 게임성이 받쳐주지 않는 이상엔 유통기한이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호러게임 중 하나라 손꼽고 있는 ‘화이트데이’ 역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할 부분이 많지만 조악하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게임성으로 빛이 바랜 비운의 명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클라이브 바커

언다잉은 영화 '헬레이저'의 감독이자 원작소설인 ‘헬바운드 하트’를 쓴 원작자로 유명한 클라이브 바커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 자신이 각본을 쓴 ‘언더월드’와 ‘악마의 마력’ 등이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에 격분한 나머지 자신의 소설인 헬바운드 하트로 영화 ‘헬레이저’를 직접 제작, 일약 최고의 공포영화 감독으로 떠오른 클라이브 바커.

이후에도 그는 캔디맨(샘레이미 감독) 등 다양한 작품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지만 시리즈가 더해갈수록 감독들이 망쳐놓는 영화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2001년엔 게임 ‘언다잉’의 각본과 감수를 맡는 기상천외한 도전을 하기에 이른다.

 

 

▶ 국내에도 친숙한 클라이브 바커의 역작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으나 한창 패키지게임이 몰락의 길을 걷던 국내시장에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한글화는 둘째치더라도 메뉴얼을 영문 그대로 패키지에 내놓는 EA코리아의 업무수행능력도 한몫했지만).

▶ 언다잉(Undying)

“머리 속에 악마가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공포물에 있어 천재적인 기질을 보여주는 클라이브 바커의 재능 덕택에 언다잉은 동종의 어떤 장르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공포적 시나리오를 선사한다. 게다가 놀라울만한 효과로 무장한 사운드, 당시 주류로 떠오르던 게임들에 못지않은 그래픽까지 탁월한 게임성을 겸비한 이 작품은 공포게임의 변천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명작으로 칭송 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건 분명 ‘사다코’형 호러로 대변되는 1회성 공포물과는 질적으로 틀린 체험을 게이머들에게 맛보여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눈을 통해 보는 공포
사실 공포를 극대화시키는데 있어 1인칭이라는 시점만큼 효과적인 수단도 없다. 화면 속에 일어나는 일들이 마치 자신의 눈을 통해 겪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점은 무엇보다 게이머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데 최상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 3인칭시점 역시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지만 내 눈을 통해 보는 공포와는 다르다

어둠 속의 나홀로나 바이오하자드 스타일의 3인칭시점게임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캐릭터를 조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만큼 공포를 선사하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일런트힐은 플래쉬라이트로 게이머의 시야를 제한하기도 하고 령제로와 같은 게임에서는 사진기를 이용해 부분적으로 1인칭시점을 도입하기도 했으나 아무래도 공포라는 면에서 약발을 발휘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

기본적으로 언다잉은 1인칭시점이라는 메리트를 안고 출발한다. 고정된 시점에서의 몰입도는 크기 마련. 게이머는 곧 언다잉의 주인공인 패트릭이 되고 게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의 시선에 머물고 있기에 패트릭이 알지 못한 내용은 게이머도 역시 알지 못한다. 1인칭 액션에선 당연한 구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 자체가 마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듯 주인공의 시각과 게이머를 일체시킴으로서 얻는 효과를 언다잉은 제대로 이용하고 있다.

흑마술사 수련가이자 게임속 주인공인 패트릭 갤러웨이는 자신이 수행을 쌓고 있었던 아일랜드에서 살인누명을 쓰고 추방당한 인물이다. 조국을 잃고 이곳저곳을 떠돌던 패트릭. 그는 어느날 아일랜드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스승 제레미아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내용인즉슨 원인을 알 수 없는 저주로 일가가 모두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패트릭은  그 마지막 계승자인 제레미아의 부탁을 받고 자신을 내친 나라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게임은 시커먼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와 어두운 맨션,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저택을 바라보는 패트릭의 시선과 함께 시작된다. 악령과 원혼들의 저주로 노쇠해진 제레미아를 만난 그는 이윽고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현상들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원치 않았던 저주의 소용돌이로 함께 빨려든다.

▶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가?

흑마술과 저주, 그리고 아일랜드라는 배경까지 언다잉은 얼핏 듣기에도 흔히 말하는 양키센스 일색의 게임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 예상은 머리털을 쭈삣거리게 만드는 게임초반부의 유령 등장신부터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런 공포는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언다잉의 게임스타일에 기인한다. 주인공은 리볼버, 샷건, 타이탄워캐논과 같은 현대의 무기를 왼손에 쥐고 디스펠, 헤이스트, 인보크 등의 흑마법을 오른손에 쥐고 있다. 마우스 왼쪽버튼을 누르면 왼손에 쥐고 있는 무기를 사용하고 오른쪽버튼을 누르면 오른손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식이다.

FPS를 표방하는 언다잉이라지만 이런 무기와 마법은 독특하게도 사용하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조준점에 들어와도 잘 맞지 않는 적과 항상 모자라는 탄환, 그리고 길고 긴 장전시간과 쿨타임까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요소는 오히려 게이머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데에서 대단한 효과를 발휘한다. 사실 언리얼 토너먼트라는 엔진까지 사용한 게임에서 액션성을 격하시킬 필요는 없었다. 모자란 탄환을 일일이 세어가며 적이 등장할 때마다 가슴 졸이는 경험을 선사하기 위한 언다잉의 컨셉은 퀘이크나 허레틱, 둠과 같은 액션게임과는 다른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스크레이라는 패트릭의 흑마법은 언다잉의 연출을 영화에 못지않은 스타일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장소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되돌려 살펴보거나 죽은 원혼을 발견하게 만들어주는 이 마법은 하늘거리는 커텐 뒤에서, 무심코 쳐다본 거울 앞에서 온 몸에 닭살을 일으키는 스위치로 작용한다.

▶ 스크레이를 통해 과거를 보고, 저주를 풀기 위한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는 과거의 재현은 모두 패트릭의 눈과 귀를 빌린 1인칭시점으로 나타난다. 과거에 일어난 일조차 마치 주인공이 겪은 듯한 느낌으로 재현되는 연출은 드림웍스 특유의 영화적 감각을 뽐내며 게이머가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은 좀 우스꽝스럽다는 느낌도 들긴 하나 나름대로 훌륭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그래픽도 공포감 조성에 한몫 한다.

게다가 당시 FPS라는 장르에선 흔히 볼 수 없었던 탄탄한 시나리오 역시 까다로운 비평가들로 하여금 찬사를 이끌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과의 대화, 그리고 그 대화에서 얻은 단서로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이야기 흐름과 거듭되는 반전은 게이머의 몰입을 극대화한다. 문제는 캡션조차 나타나지 않는 영어음성의 압박 -_-;

무엇보다 언다잉의 소름끼치는 경험을 선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운드다. 완벽한 3D사운드를 지원하는 언다잉에서 게이머는 시종일관 기분 나쁜 악령의 속삭임과 하녀들의 비명, 아기의 울음소리까지 공포의 50% 이상을 좌우한다는 ‘사운드’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만족도를 준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언다잉의 공포 속에서 사운드는 그나마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조금이나마 예고해주는 장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언다잉은 클라이브 바커가 참여하기 전까진 그저 그런 호러기반의 하드코어 액션게임에 불과했다. 젊고 창백한 피부를 지닌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 패트릭도 대머리 백작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데다가 게임의 진행방식도 미로 찾기에 불과한 수준이었다고 하니 그 상상력이 대단한 힘을 발휘한 것은 분명하다. 단순히 시나리오 수정과 감수에 불과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조차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것만 봐도 그가 이 작품에 가지는 자긍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약간 엇나간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나 흑마법과 죽지 않는 악마의 모습을 담고 있는 언다잉은 동북아 이슬람국가들 사이에서 출시가 금지되는 조치를 당했다. 출시금지 이유는 언다잉의 게임내용이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교리를 일부 침해했다는 것. 지역 이슬람교도들의 강력한 저지로 출시금지처분까지 내려진 언다잉은 당시 각종 언론에 오르내리며 세간의 화제를 집중시키기도 했다.

이제 준비됐는가?
요즘엔 TV에서 전설의 고향도 안해주고 미스테리 극장 류의 실화담도 별로 나오지 않아 후덥지근한 밤을 선풍기를 부여잡고 지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에이콘도 없고 극장 가기에도 귀찮고 돈 아까운 우리 게임메카 서민들이여… 왠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으스스한 게임을 즐기며 등골에 식은땀을 내리고픈 욕구가 치솟지 않는가?

‘령 붉은 나비’를 비롯 ‘구원’, ‘서퍼링’에 이르기까지 최근 발매된 다양한 호러게임도 물론 공포감을 맛보는 덴 큰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호러게임을 즐기는 족족 그 시시함에 몸서리쳤던 경험이 있는 게이머나 비 오는 밤 초등학교 6학년 3반 교실에서 혼자 앉아 있어도 무덤덤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라면 언다잉은 가장 적절한 공포불감증 치료제라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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