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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소프트의 족적을 밟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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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미국 텍사스의 작은 창고에서 게이머들의 아드레날린을 샘솟게 하는 방법을 깨우친 한 쌍의 게임 개발자들이 등장했다. ‘존 카맥(John Carmack)’과 ‘존 로메로(John Romero)'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청년이 바로 그들이다.

울펜슈타인 3D와 둠, 그리고 퀘이크라는 세 가지의 게임명을 나열하는 것 이상으로 이들에 대한 수식문구가 필요하겠는가? 수만명이 넘는 게이머를 게임제작자로 탈바꿈시킨 둠 소스코드 공개사건, 회사 설립후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규모의 그래픽 카드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그들의 족적은 충분히 디벼볼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이번 코너의 주인공으로 ‘id소프트’를 임명했다.

 
 

id소프트의 CEO이자 메인 프로게이머이자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게임제작자이기도 한 존 카맥

1991년 id소프트를 설립한 존 형제는 자신들이 존경했던 스승이기도 한 프로그래머인 실라스 워너(Silas Warner)에게 그가 5년 전에 제작한 고전 게임 ’캐슬 울펜 슈타인(Castle Wolfenstein)'을 1인칭 액션게임으로 재구성해도 되는지 물었다.

문제의 역작

물론 아마추어에 불과한 그들의 호기심 어린 장난이라고 생각한 워너는 선뜻 승낙했다. 그러나 존 카맥 일당이 불과 몇 개월 만에 새롭게 만들어 온 울펜슈타인 3D는 워너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연히 진짜 3D가 아닌 2D게임이었지만 공포영화에 버금가는 스릴과 흠잡을 곳 없는 게임구성은 그를 비롯한 모든 게이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자고 일어나서 스타가 됐다’라는 말은 이들을 지칭하는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당시의 게임제작사들은 이들의 시도가 단순히 운에 불과했고 하루아침에 출세한 햇병아리 정도로만 치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카맥과 로메로는 울펜슈타인 3D로 게임계의 판도를 바꿔놓기 이전에 이미 12개의 게임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서태지가 1집의 모든 곡을 준비한 상태에서 데모테잎을 들고 음반사를 찾아다녔던 것처럼(-_-;) 이들도 역시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해둔 상황이었던 것이다(그러고보니 서태지가 데뷔했을 때와 시기가 비슷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통사들은 id소프트와의 연줄을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미 수많은 게임을 만들어두고 있었다

소프트디스크(SoftDisk)와의 계약 하에 거의 달마다 하나씩의 게임을 내놓는 두 사람을 접촉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들의 게임을 얻어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id소프트에는 전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날아오는 팬레터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일쑤였다. 특히 id소프트에서도 조금 생긴 편(?)인 존 로메로는 팬레터를 꽤나 많이 받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여지껏 수집한 팬레터를 모아놓고 들여다보던 중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 수많은 팬레터 중 대부분이 이름만 다르고 주소가 동일한 것이었다. 이 팬레터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어포지(Apogee)'의 설립자 ’스콧 밀러(Scott Miller)'였다.

울펜슈타인 3D가 나오기 이전에 스콧은 이미 이들과 계약하기로 결심했지만 경쟁 유통사인 ‘소프트디스크’의 사전검열(?) 때문에 ‘어포지’라는 이름을 못 밝히고 계속해서 다름 이름으로 팬레터를 보내면서 연락을 기다린 것이다. 어쨌든 카맥과 로메로는 결국 이 노력에 감동하여 스콧 밀러에게 연락을 취하고 ‘커맨더 킨(Commander Keen)' 시리즈를 제작하기로 계약서에 사인한다.

당시 큰 인기를 누렸던 커맨더 킨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커맨더 킨 역시 울펜슈타인 3D와 함께 id소프트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한 작품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장을 내미는 존 형제의 정신과 뜻이 맞지 않았던 이유 때문인지 이후 id소프트는 계약 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어포지와 결별을 선언하고 액티비전과 유통계약을 체결, 현재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게임계의 판도를 바꾼 운명의 D데이, 1993년 12월 10일이 그렇게 다가왔다.

 



id소프트는 울펜슈타인 3D 발표 이후부터 비밀리에 작업해온 ‘둠’을 쉐어웨어 소프트로 AOL(아메리카 온라인)에 첫 공개한다. 쉐어웨어란 현재의 데모버전처럼 게임의 맛보기를 보여주는 형태의 소프트웨어를 뜻하는데 완전한 버전을 구입하기 위해선 프로그램에 게재된 통장번호로 돈을 입금하는 방식의 판매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다양한 유틸리티가 이러한 쉐어웨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지만 id소프트의 ‘둠’은 이 시스템을 전 세계적으로 유포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둠 1편은 유통인프라와 인터넷 구축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1백만장 판매, 천만건이 넘는 쉐어웨어버전 다운로드 수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참 쇼킹한 게임이었지...

1993년 12월 10일, 둠의 공개 후 이 작품은 울펜슈타인의 차원을 뛰어넘는 FPS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이 작품은 1994년부터 미국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인터넷의 확장에 큰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스타크래프트와 O양 비디오(?)가 인터넷의 확산속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면, 미국에선 둠과 카멜라 앤더슨 비디오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진 인터넷의 확장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IT 산업발전에 있어 게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둠의 출시 후 1년 뒤에 나타난 둠 2는 출시당시 4인용 랜 플레이와 모뎀을 이용한 1:1 대결을 지원하여 게이머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냈다. 즉 1인칭 액션게임의 멀티플레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구축해낸 것이다. 물론 발전된 레벨디자인과 게임성이 이러한 장점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id소프트가 큰 인기를 누렸던 것은 게이머의 참여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소스코드공개 방침이었다. 울펜슈타인 3D를 시작으로, 둠, 둠2, 퀘이크 등 자사가 제작하는 모든 게임의 소스코드를 공개하면서 게임제작의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줬다.

개발 직후 항상 그들이 공개하는 프로그램의 소스코드는 엄청난 숫자의 관련 게임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게임의 모든 최신기술이 집약된 소스코드를 공개하는 것은 개발자의 입장으로서 결코 쉽게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며 경쟁사의 견제를 받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만하다고 느껴질 만큼 자신감에 넘쳤고 또 그만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어쨌든 id소프트의 이런 정신은 ‘모드(Mod)’라는 개념을 게임에 도입시킨 기념비적인 일로 기록된다. 또한 id소프트는 이러한 모드제작자들을 자사로 스카웃하여 차기 프로젝트에 착수시키는 대담한 행동도 선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모드 팀은?
퀘이크 1 엔진을 기반으로 팀포트리스라는 게임을 제작하던 팀이 바로 밸브(Valve)사였다(물론 당시엔 그냥 아마추어 밸브팀이었다). 이들은 그냥 한 사내에서 게임을 즐기는 동아리에 불과했으나 몇몇 재능있는 개발자들이 팀포트리스라는 퀘이크 1의 모드를 만들고 이것이 하프라이프를 위한 전문팀으로 발전되면서 세계적인 개발사 중의 하나로 남게 된 것이다.

이들은 공개된 퀘이크 1 엔진과 퀘이크 2의 모델링/맵핑 소스를 개조하여 하프라이프 엔진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이를 이용, 카운터 스트라이크라는 최대의 화제작을 제작한 구스맨도 id소프트의 선택받은 개발자 중의 한명이었다. 물론 인기작을 제작하고 엔진을 유연하고 매끈하게 바꾼 것은 그들의 실력이었지만 게임제작의 밑바탕을 그려준 회사가 바로 id소프트였다는 점에서 이들이 게임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id소프트의 승승장구는 3D 렐름, 루킹글래스와 같은 고도의 실력을 지닌 개발사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한다. 헤러틱과 헥센 등 둠의 공포감을 극대화시킨 작품으로 둠의 연장선을 그려나가고 있었던 id소프트는 자신들이 배신을 때리고 뛰쳐나왔던 어포지사의 후광을 받은 3D 렐름사의 듀크뉴켐3D라는 경쟁작을 만나게 된다. 듀크뉴켐 3D로 FPS의 황제라는 명칭이 3D 렐름사로 넘어가려던 찰나 id소프트는 결국 1996년 퀘이크라는 새로운 1인칭 액션게임을 제작하고 그 이름이 게임이라는 산업과 불가분의 관계를 구축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퀘이크 1편의 출시 당시엔 둠의 제작된 시기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소 무리하게(?) 높았던 요구사양과 난해한 세계관 등이 그 이유였는데 무엇보다도 경쟁작의 출시로 독보적인 정상을 지키고 있었던 위치가 흔들린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id소프트는 1년 뒤 곧바로 퀘이크 2를 출시하고 비교적 높은 사양에도 불구하고 한달만에 백만장 판매를 돌파시키며 또다시 타 제작사가 뛰어넘을 수 없는 아성을 구축한다.

퀘이크 게이머들이 만들어가는 축제. 퀘이크콘

또한 1996년부터 id소프트가 열기 시작한 퀘이커들의 축제, ‘퀘이크콘’은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게임대회의 개념이 전무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서 id소프트사는 게임디자인에 관한 워크샵을 비롯해 여성 게이머들을 위한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며 일반인은 물론 개발자들에게도 큰 도움을 줬다. 이후 id소프트는 더욱 본격적인 엔진라이센스 계약을 맺게 되는데 제다이나이트 2: 제다이아웃캐스트, 솔저 오브 포춘, 하프라이프, 하프라이프 카스, 스타트렉 엘리트포스, 아나크로녹스 등 수많은 명작들이 퀘이크 엔진을 이용했다.

그러나 언제나 퀘이크의 명성이 이어질 순 없었다. 당시 갑작스럽게 등장한 에픽메가게임즈의 언리얼 토너먼트가 id소프트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멀티플레이 전용게임으로 등장한 언리얼 토너먼트는 퀘이크 2와는 다른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며 퀘이크 게이머는 물론 일반 게이머들의 관심까지 한꺼번에 끌어들이게 된다. 바야흐로 id소프트가 퀘이크의 후속작으로 살아남느냐 죽느냐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id소프트의 발음과 그 유래
id의 발음은 [이드]가 맞다. 여기서 지칭하는 id는 프로이드가 자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인성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id를 뜻한다.
id, ego, super ego
이중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본성(폭력, 살인 등)이 id이지만 사회에선 용납이 안 되는 본성을 게임에서나마 구현하자는 것이 id소프트의 목적이다. 이들이 악마숭배자라는 꼬리표까지 달고 다니며 다양한 게임을 제작했던 연유가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다.  
 



1999년 퀘이크 3 아레나 테스트버전이 출시되며 PC 게임계는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본래 id소프트는 퀘이크 2 출시 이후 확장팩 제작에 전념하고 과거 울펜슈타인이나 둠처럼 싱글플레이의 묘미를 새롭게 살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퀘이크 3 어리너 아티스트팀의 모습
퀘이크 3 어리너 레벨 디자이너팀의 모습. 카맥의 프로그램 팀을 포함, 불과 9명이 퀘이크의 신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듀크뉴켐 3D와 언리얼 토너먼트의 위력은 예상 외로 막강했다. 게임가에서는 “id소프트의 시대는 갔다”라는, 안 그래도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id소프트 개발진들의 성질(?)을 건드리는 말만 오고갔다. 이 중 메인 프로그래머이자 id소프트의 회장이기도 한 존 카맥은 듀크뉴켐 3D가 출시되던 당시 이미 제작해둔 트리니티 엔진을 이용한 싱글플레이 게임 제작을 철회하고 퀘이크 3를 멀티플레이 전용 게임으로 제작하자고 팀원들에게 권유를 시작했다. 퀘이크 2가 출시되고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한 존 카맥의 요구는 관철됐고 언리얼 토너먼트의 모든 효과와 특징을 흡수하고 또 멀티플레이 안정성에서 막강한 기능을 보유한 퀘이크 3 어리너를 1999년 출시한다. 이와 같은 발표는 1998년 3월 미국의 개발자 포럼에 존 카맥이 글을 남기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당시 게이머들의 항의는 대단했다.

개발자 포럼 .plan에 남겨진 당시 존 카맥의 글
(총 덧글: 51,896개 - 사상 최고의 덧글숫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 1998년 3월 13일 금요일 오후 8시 07분
id소프트는 퀘이크 3에 사용될 싱글플레이어 위주의 엔진 ‘트리니티’의 개발을 무기한 연기하고 새로운 엔진을 도입한 후속작을 제작할 것이다.
게이머들의 반응: 울티마 언더월드나 씨프 형태의 게임으로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를 높임.
- 1998년 6월 16일 화요일 오후 5시 16분
우리는 퀘이크 3 어리너의 제작을 스토리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션위주의 싱글플레이와 멀티플레이 모드로 구성된 전형적인 액션게임이 아닌, 데스매치 플레이가 강조된 새로운 스타일의 게임으로 개발할 것이다.
게이머들의 반응: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 1998년 8월 20일 목요일 오후 10시 33분
우리는 액티비전에게 퀘이크 3 어리너를 멀티 위주의 게임으로 만들 것이라고 통보했다. id소프트 직원뿐만 아니라 액티비전 역시 찬성의 의견을 밝혔다.
게이머들의 반응: 실망이다. id소프트가 멀티플레이라는 단순한 유행을 따라가는 그런 곳인줄은 몰랐다(-_-).

어쨌든 점차 언리얼 토너먼트에 익숙해져 가고 있던 게이머들은 퀘이크 3의 테스트 버전이 출시되자 변함없는 믿음으로 다시 퀘이크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후 CPL과 같은 세계적인 게임대회에서 퀘이크 3를 앞다투어 소개하고 수많은 고수들이 탄생하며 다시 id소프트의 세상이 도래한다.
그래이 매커와 너브
이들의 도움으로 울펜슈타인은 다시 부활한다

퀘이크 3로 또다시 인기궤도에 오른 id소프트는 1997년 당초 계획했던 울펜슈타인의 부활을 이뤄냈다. 2001년 id소프트는 그래이 매터 인터랙티브, 너브 소프트웨어와 파트너쉽 계약을 맺고 자신들을 이 자리에 있게 한 과거의 역작,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을 단기간에 제작하여 출시한다. 퀘이크 3 아레나 그래픽 엔진으로 제작된 이 게임은 출시 이후 한달 여만에 또다시 1백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달성한다. 이 작품은 2001년 말 퀘이크 3 엔진으로 제작된 EA의 메달 오브 아너와 미묘한(?) 경쟁을 시작하는데 똑같이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개성을 갖춰 두 작품 모두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id소프트는 엔진판매나 리턴 투 캐슬울펜슈타인의 판매량 정도에 안주할 회사가 아니었다. 이들은 이미 1999년 퀘이크 3가 출시되던 당일부터 둠 3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있었다.

왕따학생 존 카맥, 장가갔다
존 카맥은 독설가로 유명하다. 독설이라는 것이 통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지위와 명성을 갖춘 인물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까? “프로그래밍으로 구현할 수 있는 상상력의 한계가 3D 그래픽의 후진성 때문에 제한된다”, “지포스4 MX440과 같은 쓰레기카드로 둠을 즐기긴 힘들지 않겠는가?”와 같은 독설로 3D그래픽카드 업계를 항상 긴장시키는 존 카맥은 사실 고등학교 시절엔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왕따 학생에 불과했다.
왕따의 성공수기

매일 집구석에 쳐박혀 C언어와 어셈블리어 책만 뒤져대던, 왕따의 표본이기도 했던 존 카맥은 둠의 성공으로 수만달러짜리 옷을 빼입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킹카로 다시 부상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존 카맥이 장가조차도 가지 못할 ‘실패한 인생(?)’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국 존 카맥은 id소프트가 퀘이크 3를 출시하기 하루 전에 회사를 뛰쳐나간 영업 담당이사 안나 강과 결혼에 골인한다(게다가 미인이다). 뭐 1년 전부터 종종 데이트를 즐겨온 사이라지만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오로지 컴퓨터에만 매달리는 사나이를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으랴?

아니나 다를까, 존 카맥은 “신혼여행을 떠날 때 컴퓨터를 함께 가져가서 프로그래밍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라는 말로 여지없이 게이머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존의 키보드에 독약을 묻혀버리고 싶다”는 안나 강의 말을 들어보면 존 카맥이 가지고 있는 컴퓨터에 대한 열정을 잘 알 수 있지 않겠는가?




id소프트의 설립배경은 비디오게임의 증가되는 판매량에 위기를 느낀 개발자(?)들이 힘을 합해 결성된 것이라지만 되려 id의 도전은 현재 비디오게임의 수많은 3D기술의 기반을 마련했다. id소프트의 행보에 따라 수많은 그래픽카드 업체는 흥망을 거듭했으며 그들의 엔진으로 제작된 주옥같은 작품들이 전 세계를 휩쓸고 다녔다.



동영상은 물론, 알파로 누출된 버전 역시 게이머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2002년에 열린 E3에서 둠 3의 플레이 영상이 비밀리에 공개된 적이 있었다. 화면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가 물리역학에 의해 반응하는 것과 실사를 보고 있는 듯한 게임플레이 영상은 업계관계자들과 게이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 당시 세계적인 개발자들의 포럼엔 “둠 3의 플레이 영상을 보고 이 바닥에 입문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다”라는 멘트가 가득할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id소프트는 둠 3로 그간 ‘엔진장사업체’라고 불렸던 4년간의 공백기간에 있었던 오해를 모두 풀어버리겠다는 각오다. 그들의 호언장담에 믿음이 가고 존 카맥의 거만한 행동에도 눈살을 찌뿌리지 않는 이유는 10년 앞을 넘겨보는 심미안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고도의 기술력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게이머들은 id소프트의 도전에 항상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으며 어떠한 돌출행동에도 비난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둠 3라는 괴물이 또다시 게임업계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지 벌써부터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마냥 부럽지 않은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도전정신이…

부록 : "존 카맥이 말하는 게임디자인"
* Salon.com 이라는 사이트에 게재된 모 게임디자이너의 글에 대한 게이머들의 덧글을 본 존 카맥의 답변
salon.com의 글을 읽은 독자들 중에서 실제로 게임 디자인이란 것을 제대로 해본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 궁금하다. 사실 플레이어가 할 일, 게임 내 환경 구성,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 아이템이나 무기 등의 도구에 대한 생각, 중심 줄거리 등 그 게임만의 고유한 장점들을 생각하고 구상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기껏해야 하룻밤 정도 머리 싸매고 있으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들 아닌가?
세계 최고의 게임 디자이너와 이 바닥을 잘 아는 노련한 게이머가 동시에 게임 디자인을 구상하고 아이디어를 경쟁한다 해도 사실 커다란 차이는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추상적 창의성'이 게임개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개발사를 제대로 굴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게임 디자인의 핵심은 앞에서 말한 게임의 여러가지 특징 및 기능들을 실제로 구현하고 테스트하면서 동시에 장단점들을 파악해서 넣을 건 넣고 뺄 건 과감히 제거하는 능력이다. 단순히 개발 초기에 이런 저런게 좋겠다는 식으로 준비하는 몇 개의 특징들을 가지고 개발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개발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세부사항이나 사소한 것들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하며 살아남은 것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디자인 자체가 좋고 나쁨을 떠나 개발진의 능력에 따라 결과물인 게임의 품질이 결정된다. 아무리 멋진 아이디어라도 제대로 구현해 낼 능력이 없는 개발진에게 맡겨진다면 좋은 게임으로 태어날 확률은 극히 낮아진다. 다시 말하자면 게임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발 초기의 디자인이 아닌, 개발 중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개발이 시작되기 전에 아무리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없다. 이 아이디어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제로 적용되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500페이지짜리 아이디어 뭉치를 가지고 꿈에 부풀어봐야 장난밖에 안된다. 개발에 있어서의 창의력을 걸고넘어지는 건 게으름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영감을 얻어서 창의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들 하지만 그 영감이란 것 역시 조금만 속으로 되새기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생각'의 일부가 아닌가? 힘을 투자할 곳을 확실히 알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이다. 목표를 명심하고 이를 완수할 때까지 한걸음씩 전진해야 한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면 둘 다 '직접 해 보고 결정을 내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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