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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연대기(The Luna Chronicle)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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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게임메카와 이야인터렉티브는 ‘귀환병이야기’ ‘쿠베린’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판타지 소설 작가 이수영씨의 ‘루나 연대기’를 매주 월/목요일 주 2회 연재합니다. 소설 ‘루나 연대기’는 ‘루나온라인’의 기본 세계관인 블루랜드를 배경으로 한 왕자의 모험담을 담고 있습니다.

 

어느 화창한 가을 날 화려한 왕의 궁정에 연회가 열렸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였다.

귀한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왕의 연회에는 온갖 보석과 귀한 모피로 몸을 장식한 귀족들이 모여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춤을 추는 반라의 무희, 불을 뿜는 곡예사, 하프를 뜯는 음유시인이 차례로 기예를 자랑한 뒤, 나른하게 술에 취한 왕이 교활하게 웃는 어릿광대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 명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하르 데 아난의 어릿광대, 웃는 입을 가진 음유시인 루사루사라고 합니다. 재미난 이야기가 없느냐고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요.

어릿광대는 거절했다.

불쾌해진 왕이 다시 한 번 어릿광대에게 이야기를 할 것을 강하게 명하자, 어릿광대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입가를 떨며 왕의 옆에 자리한 아름다운 왕비에게 붉은 장미를 선사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입니다. 제가 바치는 찬미를 받아주소서.

얼굴을 붉힌 왕비는 기분 좋게 장미를 받았다.

희고 고운 얼굴을 한 왕비는 백합처럼 가녀리고 진주처럼 눈이 부셨다. 나이 든 왕과 대조적인 그 아름다움에 연회의 모든 이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광대야. 이야기를 하라.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도 재미있기만 하면 너에게 보석을 주마.

왕비의 아름다움에 만족한 왕이 다시 한 번 명했다.

그러자, 어릿광대는 연회를 둘러 보며 껑충껑충 뛰었다. 붉고 푸른 옷자락이 바짝 마른 광대의 다리에 휘감기며 요란한 색채를 뿌렸다. 광대의 손에서 희고 검은 구슬이 이리저리 날아 광채를 토해내자,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훠이, 훠이! 이야기 대신 재주를 넘겠습니다!

광대가 다시 한 번 거절하자, 왕이 이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천한 네 녀석이 감히 내 명을 거절하는 것이냐? 그 목을 잘라 소금에 절이고 그 다리를 잘라 개에게 먹이겠노라!

그 말에 놀란 광대가 고개를 바닥에 처박으며 빌었다.

―위대하신 왕이여, 천한 것을 용서해 주소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오로지 비극뿐이라,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것뿐이옵니다.

왕은 비극이어도 상관없다 말하고 광대를 재촉했다. 보고 있던 아름다운 왕비가 화가 난 왕을 달래며 붉디붉은 포도주를 권했다. 지켜보던 귀족들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을 기대하며 모여 들었다. 금실 은실로 짠 실크 카페트 위에 선 광대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말씀드릴 이야기는, 인간의 질시에 희생된 아름다운 왕자의 이야기랍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드신다면 제게 금화를 내려 주십시오.

감질나게 떠드는 광대의 말에 짜증이 난 왕은 이야기를 재촉했다.

바로 그때, 뿔피리 소리를 내며 연회장으로 들어선 이가 있었다.

검푸른 비단으로 지은 셔츠에 사슴 가죽 바지와 조끼를 입고 금과 에메랄드로 장식된 목걸이를 건 아름다운 왕자였다. 왕의 첫 번째 아들이자, 왕비의 사랑스런 외아들인 왕자는 당당한 위엄과 힘을 드러내며 왕의 발치에 사나워 보이는 검은 사자를 내려놓았다.

―존경하는 아바마마. 아바마마의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어둠의 숲에서 가장 큰 사자를 사냥했나이다. 이 사자의 가죽으로 아바마마의 위엄을 살리시고 강녕하소서.

우렁찬 왕자의 말에 귀족들 사이에서 감탄성이 퍼져나갔다.

아직도 체온이 남아 있는 흑사자의 몸체는 너무도 거대해 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 피에 젖은 굵은 송곳니는 강철로 만든 칼날처럼 날카롭고 무시무시했으며 위엄에 찬 머리통은 자그마한 왕비의 몸보다도 컸다. 이 어마어마한 사냥감을 본 이들은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이 아름다운 왕자가 홀로 맹수를 잡아 왔다는 것에 감탄보다도 두려움을 느꼈다.

왕좌에 앉은 왕조차도 이 거대한 사자의 시체에 겁을 먹었다. 젊은 왕자보다도 왜소한 몸을 가진 왕이 초라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것을 어찌 잡았느냐? 이렇게나 끔찍한 놈을 어찌 잡았느냐?

―사흘 밤낮을 숲에서 기다리고 기다려, 마침내 활로 쏘아 잡았나이다.

왕자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겁에 질린 왕은 아직도 시퍼렇게 안광을 번뜩이는 사자의 시체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서 저 것을 치워라. 저 것은 어둠의 숲에 사는 마수의 왕. 검은 그림자의 사자. 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도다.

창백해진 왕이 말하자, 마음을 상한 왕자는 거대한 숲의 왕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칼을 찬 전사들과 강한 것을 동경하는 소년들이 왕자의 뒤를 따르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어둠의 숲에 사는 가장 무서운 마수의 왕을 잡은 왕자의 용맹에 존경을 표하는 그들의 함성 소리가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들의 음성보다도 컸다.

왕자가 사라지자, 왕은 파리해진 안색을 숨기며 광대를 재촉했다.

―어서, 어서 이야기를 하라.

요악한 웃음을 매단 광대는 용감한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아하게 절을 했다.

―사람의 마음은 금이 간 항아리와 같아서, 단단해 보이고 매끈해 보이지만 사실은 틈이 있답니다. 그 틈새로 차가운 물이 스며들면 마침내 틈새를 비집고 물이 새어 나오기 마련.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비극도 그러한 것입니다.

왕은 상냥한 왕비의 흰 손을 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아리땁고 아름다운 왕비와 결혼한 평범하고 소심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분 전하 사이에서 아이가 탄생하였답니다. 그 아이는 태양처럼 빛나는 미소와 사람들을 휘어잡는 강인한 용기와 힘을 가진 왕자였습니다.

광대의 말에 왕의 얼굴이 굳었다.

―왕국의 모든 이들이 왕자를 흠모했습니다. 자랑스런 왕자님은 무엇을 해도 우수해서 검의 명수이며 하프의 명수인 동시에, 노래와 춤도 대단했습니다. 무엇보다 강인한 전사로 태어난 왕자님은 위대한 사냥꾼인 동시에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이 왕자님을 자랑스러워하고 시인들도 전사들도 찬양하기에 바빴습니다.

광대의 목소리가 음험하게 잦아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화창한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언덕을 바라보고 있던 왕이 문득 생각했습니다. <저토록 아름답고 잘난 아이가 정녕 내 아들일까.>

그 무시무시한 의심이 문득 고개를 들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광대의 입가에 허연 거품이 일어났다. 악의와 조롱이 뒤엉킨 시선에 왕의 몸이 움찔거렸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평범하고 모자란 인간은 자식조차 질시하는 것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남을 밟고 올라서고 싶어 하는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일까요?

광대가 팔짝팔짝 뛰며 웃었다. 소름끼치는 그 말투에 왕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네, 그렇습니다! 왕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저 아리따운 왕비가 혹여 나를 배신한 것은 아닐까? 어딘가의 미남자와 간통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광대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광기에 사무친 눈동자에서는 불길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혹여, 저 저주받은 마물의 피를 받은 것은 아닐까! 저주 받은 어둠의 숲에서 기어 나온 마물의 피를 받은 사생아가 아닐까!

왕과 왕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른 귀족들 역시 새파랗게 질렸다. 광대의 말은 이 자리에 없는 왕자를 음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둠의 숲에서 마수를 사냥하는 뛰어난 전사인 왕자, 그리고 한 번도 진 적 없었던 무패의 사냥꾼. 광대가 펄쩍펄쩍 뛸 때마다 보는 이들도 움찔댔다.

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광대를 향해 주저 없이 칼을 휘둘렀다. 마침내 광대의 목이 뎅겅 잘려 나가 피를 뿌리자, 그제야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참한 광대의 주검 앞에서 왕은 분풀이 하듯 광대의 사지를 찢고 살점을 뿌렸다.

―함구하라!

왕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듣는 이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지만 한 번 들은 무시무시한 의심의 그림자는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광대의 잘린 목이 비실비실 웃었다.

한편, 연회장에서 쫓겨난 왕자는 체온이 식지 않은 흑사자의 시체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거대한 사자의 시체에 두려움을 느낀 시종들이 모두 물러간 뒤, 왕자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 아름답고 훌륭한 사냥감을 왜 아버지는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 걸까.

그 때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사자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위대한 사냥꾼이여,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니라.

―무섭고도 아름다웠던 어둠의 숲의 왕이여, 그대는 나를 증오하지 않는가?

―맹자(猛者)가 증오하는 것은 비겁자뿐이다.

왕자는 풍만한 사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러하다면, 어둠의 숲의 왕이여, 그대는 나의 친구로다. 나에겐 부하가 있을 뿐 친구가 없었노라.

그 말을 들은 죽은 사자의 왕이 기쁨으로 속삭였다.

―좋다. 이미 나는 죽은 자이나, 그대에게 손을 내미노라. 받아라. 나의 가장 큰 송곳니를. 그 송곳니가 너의 생명을 보호하리니. 마셔라, 식지 않은 나의 피를. 그 피가 너의 몸 안에서 독을 밀어 내리라. 취하라, 나의 살을. 그 살이 너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사자의 말을 들은 왕자는 흑사자의 몸에서 송곳니와 살점과, 피를 취했다. 피비린내 나는 풍경에 보는 이들이 모두 겁에 질렸으나 왕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사자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왕자를 보며 죽은 사자의 왕이 속삭였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으니. 너는 죽은 자의 친구가 되었노라. 그리하여 나는 너를 보호하리라.

죽은 왕이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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