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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대학 3장 유통론-CHAPTER 1. 청소년이 만든 상품을 노인이 파는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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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공존하는 업계

내심으로는 유통업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들 덕택에 먼 곳에서 만들어진
게임 소프트를 집 근처에서 살 수 있으니까

히라바야시 히사가즈

게임 소프트를 유통시킨다
유통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이상으로 흥분되는 게임(사고 훈련)이 있을까?

아카오 고우이치

 

게임 비즈니스를 이해하기 어려운 원인 중에 업계의 다면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게임 산업'이라는 산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레저 산업, 컴퓨터 산업, 완구 산업이 섞여 있는 것을 우리는 편의상 게임 산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세가, 남코, 타이토는 오락기기 오퍼레이터로서 초석을 세운 회사입니다. 그 역사와 기업 풍토는 '레저 산업'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립니다. 허드슨, 스퀘어에닉스, 코에이는 PC 소프트를 개발해 온 회사입니다. 즉 정보처리업의 일종입니다. 위의 회사는 컴퓨터 소프트 산업에 속합니다.

게임 등장 이전의 오락기기, 유원지의 청룡열차, 주크박스, 핀볼(일본에서는 프리퍼 게임으로 불린 적도 있음), 크레인 게임, 땅콩 판매기, 백화점 옥상의 덤블링, 슬롯머신 등.

코에이, 에닉스, 일본팔콤. T&E 소프트 등. PC 게임 소프트 회사의 업계 참여는 81년부터 82년에 걸쳐 집중되었다.

그러면 그들이 제작한 게임은 누가 팔았을까요? 그것은 완구 유통입니다. 완구점을 중심으로 판매된 것이죠. 게임은 역시 '완구 산업'의 한 품목이기도 합니다.

게임 산업을 꿀꺽 삼키면 어떤 맛이 날까요? 그것은 레저 산업과 컴퓨터 소프트 산업과 완구 산업을 믹서로 뒤섞은 것 맛이 아닐까요? 게임 산업은 아직 새롭기 때문에 각 업계 고유한 맛이 하나로 융합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각 산업이 각각 뒤섞여 있는 업계라고 할까요. 그도 그럴 만합니다. 레저 산업은 50년대부터 인지되어 온 사업으로 대략 5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뮤즈먼트계 메이커로서 창업을 가장 먼저 한 타이토의 설립은 1955년입니다. 컴퓨터 소프트 산업은 더욱 짧습니다. 이 비즈니스, 특히 PC용 패키지 소프트를 판매하는 비즈니스는 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대략 25년 된 산업입니다. 25년 된 산업과 2백년 된 산업이 짝이 된 게임 비즈니스가 가능합니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공존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부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게임 산업은 청소년이 만든 상품을 노인이 파는 산업이다. 그래서 산업간 세대의 갭이 생깁니다.

최근 들어 완구 유통의 체질이 너무 오래 되었다는 비판이 많아졌습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완구 유통의 화제를 중심으로 게임 유통의 문제점을 찾아보겠습니다.


2.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시작과 에도시대의 쵸닌문화

게임 산업은 젊은 소프트 메이커와 오래 된 완구 유통이라는 언밸런스한 조합으로 구성되어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이론을 갖지 않아도 회사 이름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게임 소프트를 만드는 회사 이름은 대부분 가타카나로 표기합니다. 남코, 캡콤, 허드슨, 타이토, 코나미, 스퀘어에닉스….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나 세가 엔터프라이즈 등의 사명도 다시 보면 근사한 이름입니다. 닌텐도나 코에이라는 한자로 된 이름은 오히려 예외적입니다. 대부분의 게임 메이커는 최근에 생긴 회사이기 때문에 트랜드 드라마에 등장할 것 같은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유통의 핵을 이루는 명문 도매상은 사극에나 어울릴법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대개 창업자의 성에서 유래하였으며 카와다, 야마구치, 마츠바야, 핫토리 완구, 아베 완구, 니시구치 상점, 안도우 골패 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예스러운 이름이 붙여져 있는 느낌입니다. 현재의 반다이 역시 과거에는 반다이야라는 분위기 있는 이름의 완구점이었습니다. 이것들은 회사명이라기보다는 가게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죠. 엔터테인먼트나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과는 다른 세계의 회사명 같습니다. 트랜디 드라마라고 하기보다는 사극이 더 잘 어울립니다.

회사명이라는 외견상의 문제는 차치하고 실제로 완구 산업은 정말로 오래 된 것입니다. 원래 완구라는 상품은 에도의 쵸닌이라는 장사꾼들에게 예능, 오락이 보급되어 그들의 생활이 사치스러워졌을 때인 1800년 전후에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가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에도의 하층 쵸닌은 만담이나 나니와부시라는 창을, 상층 쵸닌은 다도나 요곡이라는 능악의 가사를 즐겼습니다. 또한 삼짇날, 단오, 칠석, 백중, 달맞이(음력 8월 15일과 9월 13일 밤의 달구경)가 레크리에이션화된 것도 이때로, 달맞이계 등의 '계'나 1년 동안 잘 지내게 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에서 놀러 다니며 구경하는 신사참배가 서민들 사이에 정착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이는 아이대로 이때부터 완구를 가지고 놀게 되었습니다. 인형을 비롯해 하고이타나 팽이는 그 당시 유행하는 완구였다고 합니다.

완구 산업은 이처럼 1800년대 에도(현재 도쿄 부근)에서 시작된 역사가 오래 된 산업입니다. 현재에도 게임을 많이 취급하는 도매상이 도쿄 서민들이 사는 시타마치 지구(아사쿠사바시/구라마에/바쿠로쵸) 주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완구라면 에도, 에도라면 현재의 시타마치가 중심지였고, 그 흔적이 현재의 게임 유통에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3. 공동운명체로서의 완구산업

완구 도매상의 특징 중에 강한 연대의식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게임 업계에서 유명한 친목단체로는 닌텐도와 직거래하는 도매상 모임인 <초심회>가 유명합니다. 또한 세가 새턴 발매 전에 설립된 세가와 완구 도매상 10개사가 공동출자한 판매회사 <세가 유나이티드>도 화제입니다. 이같이 게임 유통은 연대의식을 갖고 하나의 상품(기업)을 육성해 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독립적인 경영보다는 공동운명체를 지향하는 경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경영자세는 다른 업계에는 없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근거로 여기에 재미있는 역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지금 말하는 역사는 직접적으로는 <초심회>나 <세가 유나이티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완구 유통업이 연대하여 비즈니스를 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4. 탄압과 연대의 역사

장난감(일본말로 오모챠)을 '완구(玩具)'라고 한자 표기하는 습관은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에는 '수유(手遊)'라고 쓰고 '오모챠'라고 발음했던 것인데, 여기서는 '완구'로 통일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완구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주 옛날인 에도 시대, 대략 1800년 전후입니다.

그 당시 3월 삼짇날이나 단오가 레크레이션화 됨으로써 인형이 서민에게 보급되었습니다. 또한 아이가 3, 5, 7세가 된 축하로 그 고장 수호신에게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축하선물로 완구를 사는 풍습도 생겼습니다. 화려한 에도의 쵸닌문화가 완구 산업을 낳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완구 산업은 탄생과 동시에 소멸되는 위기를 맞습니다. 미즈노 다다쿠니가 에도 막부의 로쥬(쇼군의 직속으로 정무를 총괄하고 다이묘를 감독하던 직책) 수좌에 오른 1841년, 텐호의 개혁이 이루어져 '검약령'이 공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검약령'은 교호, 간세이의 개혁에서도 나왔지만 텐호의 개혁에서는 결발, 전당표, 제례, 사치스러운 의복, 요리와 건축에 이르기까지 서민의 생활을 더욱 구속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풍속, 생활 문화를 통제했습니다. 또 예능이나 오락도 금지되어 인기 배우인 나나다이메, 이차카와 단쥬로 등이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유행할 기미가 보였던 완구도 탄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의 완구업자는 에도쵸 봉행소(무가시대에 행정사무를 담당하던 쵸의 장관이 있는 관청)에 불려가 처벌당했으며, 고가의 히나 인형을 절구에 빻는 히스테릭한 탄압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에도의 서민은 완구를 사랑했었다고 합니다. 기근이 거듭되어도 인형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하는데, 오히려 한창 기근이 심할 때에는 '쌀먹는 쥐'라는 꼭두각시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무너져가는 완구 산업, 문화를 지탱한 것은 이들 업자끼리의 확고한 연대의식이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쌀을 배불리 먹고 싶은 서민의 바람을 쥐를 빌어 완구화한 것

완구 산업과 국가 권력과의 싸움은 막부 시대가 지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도 계속됩니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찾아온 문명개화, 구습타파라는 시대의 흐름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타격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1873년(메이지 6년)부터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개력이 의외로 완구 산업을 크게 흔들리게 만듭니다. 같은 해 1월 신정부의 태정관(메이지 신정부의 최고 관청)에는 다섯 명절의 폐지령을 내립니다.

'금번 개혁에 있어서 인일(정월 초이레), 삼짇날, 단오, 칠석, 중야의 다섯 명절을 없애고 신무천황 즉위일, 천황 탄생일을 앞으로 축일로 정한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에도, 아니 이제 막 탄생한 도쿄에 퍼져 있는 완구업자들에게는 사활이 거린 문제로까지 치달았습니다. 당시에는 하고이타, 팽이, 바람개비 외에 양철을 세공한 완구도 등장하여 완구 산업은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지탱한 것은 역시 유일한 고액 상품이었던 히나 인형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명절이 가까워지면 열리는 삼짇날 시장은 다른 완구를 판매하는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명절이 폐지된다는 것은 완구업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때 완구업자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텐호의 개혁으로 인한 숙청이라는 태풍 속에서 빠져나온 그들이 갖고 있던 교훈은 완구 업계가 다시 단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도쿄의 완구 도매업자들은 다섯 명절을 존속시키자는 탄원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달력상에 명절을 폐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인형을 장식하는 풍습만은 허락해 달라'고 메이지 정부에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한 효과가 있었는지 같은 해 4월에 니혼바시 혼세키쵸 쥬켄덴에서 투구 인형의 판매가 허가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당시의 유력 완구 도매상 중의 한 명인 요시노야 토쿠헤이라는 인물이 솔선해서 주도했다고 합니다. 그의 위대한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해 도쿄의 완구 도매상과 인형 판매상간에는 '요시노야 토쿠헤이'라는 부적이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관동지구에서는 TV CM이 흐르는 요시코쿠의 창업자

이렇듯 완구 업계는 텐호의 개혁과 다섯 명절의 폐지령 등의 외적인 압력에 대항하는 동안에 연대의식이 강한 업계가 된 것입니다.

그런 탓일까요? <도쿄 히나 인형 도매조합>이라는 조직이 메이지 시대 초부터 결성되어 1903년(메이지 36년)에는 기관지 <도쿄 히나 완구상보>가 창간되었습니다.

현재는 <토이저널>이라는 이름으로 <도쿄 완구 인형 도매협동조합>에서 월간지로 발행되고 있다.

참고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잡지인 <메이로쿠>는 1873년에 창간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30년 후에 완구 업계에서 기관지를 발행하였으니 이 업계가 얼마나 오래되었고 동업자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예춘추>나 <중앙공론>이 창간되기 훨씬 전부터 완구 유통 업계는 정보교환을 위한 미디어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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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versity of Computer Gaming World
Copyright(c) 1996-2004 by Hirabayashi Hisagazu, Akao Koichi
Originally published in Japan in 1996-2004 by Media Factory Co., Inc. Tokyo
Korean translation Copyright(c) 1996-2004 by A.K. Publishing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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