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햄프셔 주 나슈아 시의 한 방위 산업회사에 다니던 67세 노인이었던 랄프 H. 베어 씨에 의해 처음 개발된 비디오게임.
‘각 가정에 마련된 TV를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용도 외에 다른 용도로 이용할 수 없을까?’, ‘TV로 게임을 할 수 있다면 TV를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하고 싶어하겠지’ 등의 발상을 통해 시작된 그의 비디오게임 개발은 ‘팩맨’이란 게임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 이후 그는 전자사격게임, 스포츠게임 등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계속 개발하기 시작했고 1967년 패드볼게임과 하키게임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5년 뒤인 1972년 4월 25일, 특허청으로부터 자신의 비디오게임이 특허품으로 등록됐다는 통지를 받고 그해 마그나복스사를 통해 ‘오디세이’라는 세계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게임을 개발, 판매했다.
한 노인의 단순한 관찰로 인해 개발된 비디오게임은 약 10만 개 정도의 판매량을 기록, 당시로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일반에 보급됐고 같은 해 일본 아타리가 개발한 3차원 우주전쟁을 소재로 한 ‘퐁’을 비롯해 ‘아스테로이드’, ‘스페이스 인베이더’ 등의 게임을 통해 비디오게임은 저변에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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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에 이 게임 안해본 사람 없을 것이다. 갤러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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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니, MS 등의 메이저 플랫폼홀더가 비디오게임에 대해 그룹차원의 전폭적인 마케팅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수익성을 이유로 EA, THQ, 락스타 등의 대형 PC게임 개발사들이 PC게임 제작규모를 점차 줄이고 비디오게임 제작규모를 늘여나가는 등 비디오게임은 30년이란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게임시장에 있어 핵심 분야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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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PC게임용으로 발매하는 것 보다 비디오게임용으로 발매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것을 락스타와 EA는 깨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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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에서는 전세계 게임시장의 주축이었던 PC게임시장의 4배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한 비디오게임시장과 이를 컨트롤하고 있는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에 대한 개략적인 발전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성년식을 치룬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의 태동
●닌텐도에 의한 시장 탄생
1983년 7월 15일 닌텐도는 패밀리컴퓨터(이하 패미컴)를 발매했다. 발매와 동시에 ‘마작’, ‘테니스’, ‘동킹콩 주니어’ 등의 게임 타이틀을 발매했지만 이후 타이틀 제작이 늦어져 발매한 직후 ‘소프트 라인업의 제동’이라는 커다란 문제점을 안게 됐다.
다음해인 1984년 남코의 ‘제비우스’가 발매된 이후 다시 패미컴의 인기는 다시 상승했고 이런 기세를 등에 업은 닌텐도는 1985년 ‘수퍼마리오 브라더스’를 제작, 발매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본게임시장을 형성했다(닌텐도는 이 일을 통해 일본게임시장에서 요지부동의 1위라는 입지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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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미컴은 제비우스와 수퍼마리오를 통해 요지부동의 1위라는 입지를 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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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미컴이 발매되기 전에도 ‘카세트 비전(에폭사, 1981년 발매)’, ‘SG-1000(세가 엔터프라이즈, 1983년)’ 등의 게임기가 발매됐고 꾸준한 판매량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게임센터에서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가정에서 즐길 수 있다는 장점과 아케이드에 뒤지지 않는 성능, 게다가 1대에 800엔밖에 하지 않는 저렴한 가격과 일정한 기간마다 새로운 게임이 지속적으로 발매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판매량이 패미컴의 등장에 든든한 토양이 됨과 동시에 패미컴의 판매에 장애요소가 됐다.

▲이 게임기를 손에 쥐어봤다는 당신은 올드유저, 가지고 있었다면 갑부! 가격은 15,000엔
패미컴이 대히트를 치자 그동안 게임센터의 아케이드게임이나 PC게임을 개발, 판매하던 회사는 자연히 개발 및 생산 체제를 패미컴으로 맞춰 나가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시장형성만 기다리고 있었던 회사들은 소리 소문 없이 슬쩍 시장에 뛰어들었다. 지금 시장에서 일컬어지고 있는 서드파티의 시초가 바로 이때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게임제작사인 남코와 코나미, 캡콤 등은 아케이드게임 제작사였으며 허드슨, 에닉스, 코에이, 스퀘어 등은 PC게임 제작사였다.
또 현재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임전문지와 공략본 등도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편 닌텐도의 강력한 경쟁상대가 된 소니는 1989년 CBS 소니였던 사업명을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로 개칭하고 ‘Captain ED’라는 패미컴게임을 제작, 판매하면서 처음 게임시장에 진출했으며 다른 계열사인 에픽소니도 소속 뮤지션과 밴드를 소재로 한 ‘TM NETWORK LIVE IN POWER BOWL(1989년)’ 등의 게임을 제작, 발매했다.
하지만 당시 그런 게임으로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연거푸 고배를 마셔야 했으며 현재 SCE를 있게 한 장본인인 쿠타라기 켄 사장이 패미컴의 상위 기종으로 개발되고 있었던 수퍼패미컴에 대응되는 CD-ROM 어댑터를 제안함과 동시에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시켰을 때 비로소 소니는 게임시장에 대한 제대로 된 출사표를 던질 수 있었다.
●소니, 닌텐도에게 도전장 내밀다
패미컴과 수퍼패미컴은 마스크롬을 사용한 카트리지 방식을 채용했다. 하지만 이런 마스크롬을 사용한 카트리지 방식은 제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비즈니스에 있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단가도 비싸 소프트의 용량이 늘어나면 게임소프트 가격도 같이 올라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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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가 발매된 이후에도 카트리지 방식을 선호한 유저들은 CD-ROM 로딩시간을 늘 문제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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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개선하기 위해 당시 소니의 쿠타라기 켄 사장은 CD-ROM 어댑터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닌텐도에 제안했다.
CD-ROM 어댑터는 마스크롬에 비해 제조시간이 짧고 제조단가도 낮기 때문에 마스크롬에 비해 비즈니스 기회도 충분히 잡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소프트 메이커로서의 위험률을 상대적으로 낮추고 고용량의 게임을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소니는 소니뮤직을 통한 CD-ROM 프레스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결국 1990년 소니와 닌텐도는 CD-ROM 어댑터 시스템 개발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점을 찾고 그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계약을 체결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닌텐도는 소니가 아닌 필립스를 새로운 파트너로 선정하고 CD-ROM 어댑터와 관련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수퍼패미컴의 CD-ROM 어댑터 시스템 개발을 통해 게임 비즈니스에 뛰어들어 게임시장에서 자리를 잡겠다는 소니의 제 3의 목적이 당시 게임시장을 주도해 가던 닌텐도로서는 호랑이를 키우는 격이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며, 두 번째 이유는 당시 PC엔진이란 기종이 이미 CD-ROM2 시스템(1988년/NEC 홈 일렉트로닉스)으로 일컬어지는 CD-ROM 드라이브를 어댑터로 채용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비쌌지만
쓸만했다. 적어도 부모님의 원조를 받을 때 까지는
그러나 이 기종들은 게임데이터를 로딩하는 시간이 카트리지에 비해 느려 게임이 부드럽게 진행되지 못했으며 하드웨어 가격이 무려 5만 7,300엔이란 고가였기 때문에 게이머들 사이에서 불평만 샀지 그다지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CD-ROM을 이용한 게임기는 당시 보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후에도 보급되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결국 한동안은 비싸도 카트리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상식으로 통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994년 당시 세가 엔터프라이즈(현재 세가-사미그룹)에서는 CD-ROM 드라이브를 채용한 ‘세가새턴’이 SCE에서는 ‘PlayStation’이 발매됐고 두 기종은 게임시장에서 차세대기라 불리며 붐 조성에 앞장섰다. 그리고 동시에 카트리지 시장을 CD-ROM 시장으로 바꿔 놓았으며 급기야는 업계 관계자들의 인식까지 바꿔놓기에 이르렀다.
결국 닌텐도는 패미컴으로 이룩한 게임시장을 고스란히 SCE의 PlayStation에게 빼앗겼으며 1992년 자신이 지켜오던 시장을 지키기 위해 결렬시켰던 소니와의 교섭이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2. 게임이 팔리지 않는 게임시장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는 2002년 2월 22일 자사의 비디오게임기인 Xbox를 발매했다. 발매 후 3일간 Xbox의 실 판매대수는 약 12만대. 2001년 9월에 발매한 게임큐브(이하 GC)가 발매 후 3일간 13만대를 판 것에 비하면 순조로운 출발이었지만 같은 기간 PS2가 98만대를 판매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그런데 하드웨어 1대와 같이 판매된 소프트의 비율(Soft Attach Late)을 보면 Xbox는 1.45개, GC는 1.22개, PS2는 0.98개로 Xbox가 다른 하드웨어에 비해 초기 소프트웨어 보급이 가장 우세하다.
하지만 PS2가 애초에 목표로 하던 것은 PS와 같이 PS2용 게임을 보급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PS2는 발매 전부터 게임기로서의 성능보다는 DVD 플레이어로서의 기능이 먼저 주목받았고 관련업계도 DVD 플레이어로서의 기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 수치는 별로 소니에게 있어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2000년 3월 4일 발매된 PS2는 보란 듯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를 낳았다.
실례로 일본의 DVD 플레이어 시장은 1999년 약 225억엔 규모였지만 PS2가 발매된 2000년에는 전년대비 약 2배가량의 신장세를 보이며 총 435억엔의 시장규모를 기록했다. 관련 컨텐츠 시장도 1999년에는 620억 규모였지만 2000년에는 1,653억엔으로 약 2.5배 이상의 신장세를 보였다(디지털 컨텐츠 백서 2002). 이런 수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PS2는 게임시장 뿐만 아니라 DVD 소프트시장도 함께 이끌어 갈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템인 것이다. 그러나 PS2가 발매되면서 그동안 게임시장의 상식으로 여겨졌던 ‘하드웨어의 보급이 소프트웨어 시장을 넓혀간다’는 도식은 붕괴되고 말았다.

▲PS2가
등장해서 이득을 본 것은 바로 매트릭스 DVD 타이틀. 당시에 없어서 못 팔았다고
90년대의 게임 소프트웨어시장에 비해 신작타이틀의 수는 3배정도 많아진 한편, 그 소프트의 출하량은 1.5배정도 떨어졌다. 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종합한 게임시장의 규모는 1994년 세가새턴과 PS 등장에 즈음해 최대 호황을 누렸으며 소프트웨어시장은 1995년, 하드웨어 시장은 1996년에 최대 호황을 누렸다. 이런 결과를 보더라도 새로운 하드웨어가 출시되면 소프트웨어 시장이 커진다는 논리는 다 지나간 옛말이란 것이다. 사실 1996년을 기점으로 기존 게임시장에서 상식으로 여겨졌던 모든 것들은 유명무실해 진 것이다.
PS2가 게임시장 신장에 도움을 준 것 보다는 DVD 시장의 신장에 도움을 준 것에 포커스가 맞춰진 사실이 어떻게 보면 이제 PS2는 게임기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음을 말해주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PS2는 게임이 팔리지 않는 게임시장을 만들어냈다고도 할 수 있다.
3. 시장의 주도권을 거머쥔 SCE
SCEA의 최고 집행 책임자인 카즈 히라이 씨는 2002년 5월에 개최된 세계 최대 게임컨텐츠 전시회인 E3쇼 개최 직전에 열린 컨퍼런스에서 ‘게임기의 전쟁은 이미 끝났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시장의 주도권은 SCE가 잡았다고 때 이른 선포를 했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게임기 출하대수는 PS2가 약 3,000만대, GC가 400만대, Xbox가 350~400만대였으며 SCEA는 당 분기에 PS2의 판매량이 5,000만대를 돌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게다가 이 전망을 확신시키기라도 하듯 당시 299달러에 거래되던 PS2의 가격을 199달러로 무려 100달러나 인하시킨다는 발표를 했다.
이런 SCEA의 발표는 PS2와 정면대결을 펼치겠다고 한 MS의 Xbox 진영을 벼랑 끝으로 내 몬 것과 마찬가지다. 이 여세를 몰아 SCE는 PS2의 판매에 더욱 주력하게 되고 그해 7월 25일에는 일본 내수 판매량 1,000만대 돌파라는 쾌거를 이뤄냈다(전 세계 생산출하대수가 1,000만대를 넘은 것은 2001년 3월). 하드웨어가 발매된지 2년 5개월 만에 이루어낸 결과며 PS에 비교해서 약 7개월 정도 앞선 결과였다.
1994년 12월 3일 발매된 PS는 발매 14개월 만인 1996년 2월 전세계 생산출하대수 1,000만대를 기록했다. 부문별로는 일본 내수판매량이 420만대, 북미시장 판매량이 345만대, 유럽시장 판매량이 235만대다. PS가 게임머신의 표준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보급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PS가 보급되는 상황 속에서 1996년 SCE의 쿠타라기 켄 사장은 PS의 개발스탭을 극비리에 모집했고 PS를 통해 주도권을 거머쥔 SCE는 비디오게임시장의 왕좌로 군림하기 위해 모집한 개발스탭을 바탕으로 차기기종인 PS2개발에 필요한 개발팀을 새롭게 구성했다. 그리고 SCE가 이렇게 PS2를 개발해 시장흐름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단지 걸출한 게임머신인 PS2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컨텐츠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게 빠른 대처를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4. 네트워크 컨텐츠 PlayOnline
스퀘어에닉스는 2002년 4월 28일 PS2용 온라인게임 ‘파이널판타지 XI(이하FFXI)’를 같은 해 5월 16일에 7,800엔의 가격에 발매하고 게임서비스에는 월 1,280엔의 이용료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비디오게임시장에 있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컨텐츠라고 할 수 있는 네트워크 컨텐츠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FFXI’는 기존의 PS2 게임과는 다른 온라인전용게임으로 유저는 게임패키지를 대형 네트워크 프로바이더로부터 구입 또는 렌탈하거나 직접 시중에서 판매하는 PS2 전용 PlayStation BB Unit(이하 PSBB Unit)를 구입해서 사용해야만 스퀘어에닉스에서 직접 운영하는 컨텐츠 사이트인 ‘PlayOnine’에 접속할 수 있고 여기서 ‘FFXI’ 온라인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PS2를 이용한 온라인게임의 아키텍처는 일단 대용량 화상데이터를 포함한 게임의 전반적인 구현능력에 관한 데이터는 패키지 소프트를 통해 사용하며 플레이어의 위치정보나 개인정보 등 소용량 데이터는 PlayOnline 서버에서 보내는 것을 사용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이런 PS2용 온라인게임을 통해 온라인상에서 채팅이나 게임아이템 등을 교환하며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국내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PC기반의 온라인게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PlayOnline이란 사이트는 단지 ‘FFXI’를 위한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스퀘어에닉스가 개발한 모든 PS2용 온라인게임 서비스에 관한 것을 총괄한다는 것이다.
서비스가 시작된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스퀘어에닉스는 ‘FFXI’와 현재로서는 FFXI 전용사이트라 부를 수 밖에 없는 PlayOnline의 제작비용으로 수십억 엔을 투자했다고 발표했다. 합병 이전 스퀘어의 대표였던 와다 요이치(和田洋一) 씨는 “PS2 온라인게임은 PSBB Unit를 유저가 구입하는 것과 그 장비를 사용자의 환경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는 것 그리고 온라인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네트워크 프로바이더와의 계약과 그에 따른 비용지불 등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것 치고는 꽤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보급에 어려움이 있다”며 “하지만 현재 게임시장은 FFXI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으며 FF시리즈는 유저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약 4~5년에 걸쳐 꾸준히 보급을 시키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급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서비스 오픈일인 2002년 5월 16일,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몰려든 접속자 때문에 안일하게 준비한 인증시스템이 유저의 과도한 접수량을 처리하지 못하고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임업계에서 이런 스퀘어에닉스와 SCE의 온라인 컨텐츠 도입의 초반 난항을 보고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전 닌텐도 대표인 야마우치 히로시(山? 博) 씨였다. 야마우치 씨는 온라인화된 ‘FFXI’는 실패라고 단언했으며 이에 대해 와다 요이치 사장은 “온라인게임은 패키지게임과는 수익구조가 다르다”며 반론을 펼쳤다.
그러나 SCE와 스퀘어에닉스가 이런 미흡함 속에서 시작한 ‘FFXI’의 온라인서비스를 통해 얻은 네트워크 컨텐츠 도입에 관한 교훈은 바로 선행투자다. 이들은 오프라인 컨텐츠와는 180도 다른 온라인 컨텐츠는 비즈니스의 리스크를 모두 감안한 상태에서 서비스에 관한 선행투자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이후 투자비용 회수라든가 서비스 안정화에 더 많은 위험 부담감이 생긴다는 것을 미리 깨닫게 된 것이다.

5. 세가, 온라인 컨텐츠의 핵심으로 떠오르다
비디오게임업계에서 제일 먼저 게임을 온라인화한 것이 바로 세가다. 세가는 자사의 게임기인 드림캐스트(이하DC)에 CPU 200MHz, 360MIPS, 리무버블 방식의 33.6Kbps 표준모뎀을 장비시키고 1999년 1월 발매된 ‘세가랠리 2’를 기점으로 온라인서비스를 제공했다. 그 후 세가는 온라인서비스가 제공되는 다양한 비디오게임을 출시했고 2000년 12월 발매한 ‘판타지스타 온라인(이하PSO)’에 이르러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308만 명이 넘는 등록회원을 모집해 컴퓨터엔터테인먼트소프트웨어협회(CESA) 주최 ‘일본 게임 대상’에서 2001년도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예상외의
수확을 올리며 명작 반열에 올라간 첫 비디오게임용 온라인게임 판타지스타 온라인
‘PSO’는 세가의 자회사인 소닉 팀에서 개발, 발매한 비디오게임사상 최초의 MMORPG로 이듬해인 2002년 PC판으로도 발매해 3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일본에서 3만장이라는 수치는 PC게임으로서는 히트작 대열에 오를 정도다).
하지만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에서의 이런 세가의 승전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찍이 PS의 최대 라이벌 기종인 세가새턴을 발매했던 세가지만 연이은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판매량 부진으로 인한 시장 점유율하락으로 세가는 2001년 자사의 차세대 게임기인 드림캐스트 생산을 중단하고 게임기 비즈니스에서 물러나게 되며 각 게임기용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데 전념해 나름대로의 활로를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그때까지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온라인 컨텐츠 개발에 주력한 결과, PSO를 통해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에 온라인 컨텐츠서비스 시장이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내고 해당 분야의 핵심으로 떠오르며 어제의 라이벌이었던 소니진영의 든든한 우방으로 자리 잡게 됐다.
세가는 2001년 12월, PS2를 플랫폼으로 한 브로드밴드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컴퓨터엔터테인먼트의 창조와 시장확대를 추진하고 있는 SCE의 메인 컨텐츠 프로바이더(MCP)가 됐으며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컨텐츠 개발로 PS진영에서 차지하는 입지를 점점 더 키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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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큐브는 온라인게임을 대응하기 위해 브로드밴드와 네로우밴드를 모두 지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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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원한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닌텐도의 전성시대
세가의 전신은 1951년 설립된 쥬크박스 등의 수입기기를 취급했던 ‘리메이어&스튜어트’였다. 세가는 1954년 서비스 게임즈(SErvice GAmes라는 이름의 약칭으로 SEGA가 생겨난 것) 사명으로 처음 출발했으며 1965년 세가 엔터프라이즈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 후 게임 센터용 아케이드게임을 제작, 판매하다가 1983년 패미컴이 발매됐던 7월, 세가도 ‘SG-1000’이란 게임용 퍼스컴을 발매했다.
세가는 당시 ‘게임도 할 수 있는 퍼스컴’이란 컨셉으로 다양한 기종의 SG-1000을 발매했지만 ‘수퍼마리오 브라더스’를 통해 게임기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한 패미컴을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가는 1985년 패미컴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신기종인 ‘세가마크Ⅲ’를 발매해 포스트 패미컴이란 수식어를 달며 유저들에게 좋은 반응을 끌어냈지만 그 자리도 1987년 일본전기 홈 일렉트로닉스가 발매한 ‘PC엔진’에게 고스란히 내주게 됐다.

▲세가는
SG-1000에 이어 세가마크Ⅲ를 발매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것도 15,000엔
지금은 스퀘어와 합병한 에닉스가 개발한 패미컴용 타이틀이자 ‘파이널판타지’와 더불어 일본 RPG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드래곤 퀘스트’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드래곤 퀘스트 Ⅲ ~그리고 전설로’가 발매되고 대히트를 기록한 그 해 10월에 세가는 최초로 16비트 게임기인 ‘메가 드라이브’를 발매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닌텐도의 게임 비즈니스는 자사가 직접 하드웨어를 제작, 판매하고 서드파티라 불리는 패미컴용 소프트를 제작하는 메이커가 게임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재 게임시장의 제작, 유통시스템의 대부분은 바로 닌텐도가 구축해 놓은 시스템을 현재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당시 게임제작사는 닌텐도에게 게임소프트 제조를 의뢰하고 닌텐도의 허가가 나면 그에 대한 로열티와 제조비용을 닌텐도에 지불해야 했다. 게임기를 싼 가격에 보급시키고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매상을 올려 하드웨어의 리스크를 커버하며 하드웨어의 판매를 확충시켜야만 소프트생산이 증가한다는 것은 게임 비즈니스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세가는 메가 드라이브에서 이런 정형화된 닌텐도의 소프트 제작시스템을 거스르며 처음으로 본격적인 서드파티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고 1990년 닌텐도가 패미컴의 상위 기종인 수퍼패미컴을 발매하면서 세가는 16비트 시장마저 닌텐도에게 내줘야만 했다. 하지만 세가가 쉽게 물러설 리가 없었다. 세가는 같은 해 바로 메가 드라이브용 모뎀인 ‘메가 모뎀’을 발매했으며, 일본 비디오게임사상 처음으로 게임 배급서비스를 시작했고 이런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에 있어 닌텐도와 세가의 라이벌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오늘의 적은 내일의 동반자
한편 소니는 1993년 새로운 자회사인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이하SCE)를 설립. 이듬해인 1994년 2월 세가가 처음으로 32비트 게임기인 세가새턴을 발매하자 이에 질세라 12월 32비트 게임기인 ‘PlayStation(정식 명칭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PS-X라는 코드명으로 불렸다)’을 발매했다. 일본 각 매스컴은 ‘차세대기 전쟁’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두 회사의 경쟁을 앞 다투어 기사로 다뤘고 이런 상황을 이용해 포맷홀더들은 유저들을 유치해 새로운 하드웨어 시장을 확대시켜 나갔다.
PS진영은 스퀘어와 스퀘어의 간판 타이틀인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끌어들임으로 해서 단번에 하드웨어 판매량을 급신장시켰고 이로 인해 PS가 지금처럼 융성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1998년 세가는 차세대 게임기인 ‘드림캐스트(이하DC)’를 발매했고 SCE가 2000년 DC의 경쟁기인 PS2를 발매했을 때 세가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비디오게임 사상 처음으로 MMORPG인 ‘PSO’을 릴리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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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가 FF7을 PS진영으로 끌어들임으로해서 낸 수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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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듬해 3월에 세가는 DC의 제조를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이미 생산된 물량을 계속 판매됐다). 그리고 그 후 SCE, 닌텐도, 마이크로소프트가 생산 유통하고 있는 게임기의 게임소프트 제작과 제공에 주력, 컨텐츠 프로바이더로서의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라이벌 기종의 진영이 상대 진영에 소프트를 제공한다는 선례는 전무했기 때문에 세가가 PS진영의 메어저급 컨텐츠 프로바이더가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세가의 경영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세가도 나름대로 얼마나 심한 고충을 겪어가면서 내린 결론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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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가는 SCE진영의 메인컨텐츠 프로바이더로서 새 삶을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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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기가 유저를 성장시키고 게임기와 유저, 서드파티가 뒤섞여 이뤄낸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시장이 성장해 나간다는 1980년대 비디오게임시장의 독특한 시장형성시스템은 세가가 플랫폼 홀더에서 손을 떼고 메이저급의 컨텐츠 프로바이더로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면서 절정을 이뤘다.
아직까지 PS2용 온라인게임 타이틀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 핵심에 서있는 세가의 노하우가 발휘될 수 있도록 브로드밴드 환경이 점차 좋아지고 있는 현재, 더 이상 세가는 SCE의 라이벌이 아니다.
7. Sony! 최대 온라인 컨텐츠 프로바이더가 되다
온라인게임산업하면 누구나가 우리나라를 꼽는다.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통신 인프라 정책, 인터넷을 저렴한 가격에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PC방 보급 등을 통해 온라인 인프라가 급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또 2002년 2월 22일 PS2가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되기 전에는 비디오게임기의 수입이 규제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PC게임이 주류를 이루게 됐고 PC게임의 멀티플레이만을 즐기고 싶어 하는 국내 유저성향도 온라인 인프라가 급속도로 발전한 배경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국내 온라인게임시장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대만도 2001년에 브로드밴드 이용자가 약 110만 명을 넘어섰으며 지난해 약 1,400억원 정도의 온라인게임시장 규모를 이뤘다.
이처럼 통신 인프라가 점점 브로드밴드화돼 가고 있으며 국내를 비롯해 대만, 일본 등 아시아 대부분 국가들의 온라인 인프라는 해가 다르게 급속도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그럼 이런 온라인 인프라가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바로 미국이다. 미국 ‘쥬피터 미디어 매트릭스’가 2001년 발표한 미국의 게임시장에 관한 조사보고에 따르면 온라인게임시장에서는 PC게임의 서비스가 가장 큰 쉐어로 자리 잡고 있으며 2006년 미국 온라인게임의 시장규모는 약 15억 달러로 신장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북미에서는 70억 달러 규모의 게임시장 내에 약 10% 정도가 되는 7억 달러 규모의 온라인 인프라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는 바로 에버퀘스트를 퍼블리싱하고 있는 소니온라인엔터테인먼트(이하SOE).
2002년 7월 SOE는 자사가 운영하고 있는 MMORPG인 ‘에버퀘스트’의 동시접속자수가 10만 명(당시 총 등록회원은 약 43만 명 이상)이 넘어 신기록을 달성했다는 발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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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인 에버퀘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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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E가 서비스하고 있는 ‘에버퀘스트’는 서비스 실시 전부터 PS2로 이식할 계획이 있었던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이를 총괄하고 있었던 소니컴퓨터네트워크(이하SCN)는 시장형성을 위해 2002년 10월 15일 ‘에버퀘스트’ 일본어 버전 서비스를 So-net 회원들에게 제공한다고 발표했고 2개월 뒤인 2002년 12월 16일부터 베타테스트를 실시했으며 2003년 2월부터 상용화서비스에 들어갔다.
SCN이 운영하는 So-net의 프로바이딩과 인터넷 관련서비스를 이용하는데 필요한 요금은 별도로 적용되지만 게임플레이가 무료인 상용화서비스였기 때문에 일본 유저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러한 인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에버퀘스트’는 Ubi soft가 발매한 것이고 서버운영 및 관리는 미국에서 담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용자 증가 때문에 SCN은 예정에도 없던 독자적인 서버를 구축해야만 했다.
비디오게임과 소니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뜬금없이 이렇게 에버퀘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는 것은 지난 ‘Net world+Interop 2002 도쿄’에서 소니가 ‘브로드밴드 시대의 시나리오 최종장’이란 기조강연을 통해 “에버퀘스트가 PS2와 연계되면 현 브로드밴드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바로 소니의 컨슈머 일렉트로닉스 서비스가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 당시 이미 소니는 PS 패밀리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한 컨슈머 일렉트로닉스 서비스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실행에 옮길 단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남은 이야기는 하편에서
[참고자료]
서적:
소니 자서전 - 소니 광고부 1998년 / 소니 혁명 - 프레지던트사 2002년
/ 아사히 키워드?경제 - 아사히 신문사 2001년 / 소니의 브로드밴드 전략 - 일본 실업 출판사 2001년
신문:
일본 경제신문 / 닛케이 산업신문 / 아사히 신문
/ 요미우리 신문
홈페이지:
요미우리 온라인 - http://www.yomiuri.co.jp
/ 소니 - http://sony.co.jp / 핫 와이어드 - http://www.hotwired.co.jp
/ 정보통신종합연구소 - http://www/icr.co.jp
/ 정보, 통신사전 terms - http://www.terms.co.kr
/ 닛케이 넷 - http://www.nikkei,co/jp/weekend/index.html
/ japan CNET.com - http://japan.cnet.com
잡지:
닛케이 비즈니스 / 닛케이 네트 비즈니스
백서:
디지털 컨텐츠 백서 2002, 2003 - 재단법인 디지털 컨텐츠 협회
/ 정보 미디어 백서 2002, 2003 - 전통총연 / 게임백서 2002, 2003 - C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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